푸른 잔디밭. 어머니 자궁 같은 어둠 속에서 어린이가 굴렁쇠 하나만 달랑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정적만 흐르고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다. 흰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흰 모자를 쓴 일곱 살 어린이와 어린이가 굴리는 굴렁쇠와 숨 막힐 듯 넓은 스타디움만 있을 뿐이다.
10만 관중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오직 한 점, 어린이와 굴렁쇠만 지켜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세계의 눈이 정적 속에 숨을 멈추고 어린이와 굴렁쇠를 본다. 굴렁쇠 하나가 세계인과 의사소통을 한다. 그때 나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감동이다. 세계를 감동시킨 2분이었다. 미지의 한국을 세계에 알린 꼬레의 정신과 문화의 상징이었다.
풀밭에 쓴 가장 긴장되고 아름다운 일행시. 얼마 전 타계한 김영태 시인이 ‘88 굴렁쇠’를 표현한 시구(詩句)다. 어린이가 달리는 운동장은 이미 잠실 올림픽운동장이 아니라 세계이며 우주며 인생이다. 어린이가 위태위태 굴렁쇠를 굴리며 그 넓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광경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처럼 고독하고 불안하고 안쓰럽다. 사람들이 주어진 죽음까지 닿는 동안 그 행보를 멈추지 못하듯 어린이의 굴렁쇠도 완주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는 가슴을 조마조마하며 어린이가 무사히 완주하기를 기도했다. 세계는 굴렁쇠에 감동했지만 우리를 감동시킨 아이디어는 이어령 선생의 창조적 상상력이었다.
허공에 쓴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일행시’는 에펠탑이다. 1889년 제1회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면서 파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11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기념 건축물이다.
귀스타브 에펠의 이 철강 건축물은 당시 많은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주변 경관을 해치는 철강 소재의 철탑은 파리지엔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모파상은 파리 시내 어디서든 보이는 그 흉물스런 철탑을 보지 않기 위해 에펠탑 내부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곳만이 철탑을 보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파리가 이 철탑을 고집한 첫번째 이유는 가장 높은 상징물을 만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시 세계 최고 높이 320m를 성공적으로 완공하고 최고의 관광수입을 올렸다. 예술성과 공업성, 추함과 아름다움의 시비 논쟁에 휘말렸던 에펠탑의 의미에는 철강시대의 의미도 있겠고, 파리라는 공간적 의미도 있다. 거기에 루브르미술관이 있고 노틀담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모파상이 있고 사르트르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준비, 10분 1mm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200여만 개의 구멍과 리벳을 만든 빈틈없는 계산, 치밀한 작업이 지반이 약해 불가능하다던 철탑을 거기에 있게 했다.
정보의 시대 다음 세대는 감성의 시대라고 미래학자들은 말한다. 정보의 시대에서 사람이 만들어낸 기계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다. 기계가 사람보다 부족한 부분이 감성이다. 마음이다. 감동시킬 줄 아는 기술을 습득해야 차세대 세계를 정복한다. 이를 위해서는 집중지수, 문화지수, 소통지수, 협력지수, 창의력 지수를 높이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한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우리의 엔젤 아우라, 감동시키는 에너지의 지수는 얼마나 될까. 어떤 상징물로 새로운 굴렁쇠의 감동을 이끌어낼 것인가. 상징물을 시너지해줄 더 많은 문화를 홍보하고 자라게 하며, 어떻게 세계적 상상력과 연결해 공감대로 연결해 낼지, 요즈음은 언론도 조용하다. 거론되는 거북선 논쟁, 운하 논쟁을 뜨겁게 달구어 에피타이저로 세계의 관심도 모아보면 어떨까.

/김유선 장안대 교수·여성문제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