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시간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5년 02월 07일(금) 00:00 가가
빰을 때리는 2월의 공기가 차다. 나름 산책에 진심이던 5년 전의 나날들이 떠오른다. 당시 급성 심근경색에서 겨우 살아난 나는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조금만 무리해서 산책하면 가슴이 아팠다. 찬 바람 맞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도 마음에 걸렸다. 가던 발길을 돌려 방으로 돌아와 우두커니 서서, 어두워지는 창 밖을 한참동안 바라보노라면, 머리 속이 정지되는 듯했다. 그렇다고 산책을 게을리하면 편치 못한 호흡 때문에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장나서 삐걱거리는 몸은 끈질기게 마음의 행로를 방해했다. 모두 잊을 요량으로 유튜브나 보려해도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희미한 분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빙빙 맴돌고 있었다. 분노라기보다 제 성질을 못이기는 신경질적인 짜증에 불과했다.
결국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이했다. 은근한 짜증에 불면의 밤까지 더해져서 심기 불편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유튜브에서 미니시리즈 ‘도깨비’의 짤방을 봤다. 기억이 사라진 차은탁은 김신을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가 김신인지 자신이 도깨비신부인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던 차은탁은 퀘백의 분수 앞에서 마침내 9년 전 일들을 모두 기억해낸다. 그리고 오열하며 김신을 찾는다. 이 장면을 보는 내 눈에서 갑자기 축축한 것이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본방송을 볼 때도 울었던 기억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은 무척이나 뜬금없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었다. 그러나 한차례 눈물을 흘린 뒤로 은근한 짜증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비슷한 경험은 그 전에도 있었다. 하루 하루가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지던 적이 있었다. 느지막한 오후 무렵, 별 생각 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희한하게도 마당 건너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만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마침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살랑살랑 춤추는 나뭇잎 위로 햇살이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며칠동안 나를 괴롭히던 갑갑증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때도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스스로 의아했었다.
‘好雨知時節’로 시작하는 두보의 시가 있다. ‘春夜喜雨’라는 제목의 이 시는 50대의 두보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잠시나마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고 한다. 두보만큼 세상을 살아서 일까, 아니면 그처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알게 되어서 일까, 두보의 심정이 내 가슴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이른 새벽 잠이 깬 두보는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듣다가 문득 첫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봄비 내리는 새벽의 정경을 그리며 다음 구절들을 이어갔을 것이다. ‘자글자글 내리는 봄비가 얼마나 반가왔으면 好雨知時節이라고 하였을까?’ 첫 구절에 마음이 꽂혀서 한참동안 현실을 망각했다. 두보는 이른 새벽 봄비 소리를 들으며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었고, ‘好雨知時節’로 시작하는 두보의 시는 그 무엇보다도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정한 위로는 항상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하며 내 안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나의 밖에서 이뤄지는 위로는 다만 위로이기를 바랄 뿐, 진정한 위로는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나를 위로한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위로는 감성의 일이지 이성의 영역은 아니다. 평상시의 평범한 나는 조금만 노력한다면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관찰할 수 있다. 매순간 생멸하는 찰나의 마음들은 담담하게 바라보는 순간 사라진다. 잠시 멈추어 내면을 돌아보려면 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없다. 내 안에서 나를 병들게 하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느끼다 보면, 자가 치유의 순간이 극적으로 찾아온다. 차은탁과 함께 눈물 흘리는 순간이라든가, 나뭇잎 위에서 눈부시게 춤추는 햇살에 흠뻑 빠져버린다든가, 두보의 시 구절에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불쑥 찾아오더라도 놀랄 필요 없다. 내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순간이다. 감정은 또다른 감정으로 치유하는 법이다.
5년이 흘렀다. 부실한 몸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쓸만하다. 대신 마음은 세파에 깎여서 많이 무디어졌다. 콧등을 때리는 바람이 유난히 차다. 오늘은 왠지 두보가 그립다.
‘好雨知時節’로 시작하는 두보의 시가 있다. ‘春夜喜雨’라는 제목의 이 시는 50대의 두보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잠시나마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고 한다. 두보만큼 세상을 살아서 일까, 아니면 그처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알게 되어서 일까, 두보의 심정이 내 가슴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이른 새벽 잠이 깬 두보는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듣다가 문득 첫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봄비 내리는 새벽의 정경을 그리며 다음 구절들을 이어갔을 것이다. ‘자글자글 내리는 봄비가 얼마나 반가왔으면 好雨知時節이라고 하였을까?’ 첫 구절에 마음이 꽂혀서 한참동안 현실을 망각했다. 두보는 이른 새벽 봄비 소리를 들으며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었고, ‘好雨知時節’로 시작하는 두보의 시는 그 무엇보다도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정한 위로는 항상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하며 내 안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나의 밖에서 이뤄지는 위로는 다만 위로이기를 바랄 뿐, 진정한 위로는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나를 위로한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위로는 감성의 일이지 이성의 영역은 아니다. 평상시의 평범한 나는 조금만 노력한다면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관찰할 수 있다. 매순간 생멸하는 찰나의 마음들은 담담하게 바라보는 순간 사라진다. 잠시 멈추어 내면을 돌아보려면 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없다. 내 안에서 나를 병들게 하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느끼다 보면, 자가 치유의 순간이 극적으로 찾아온다. 차은탁과 함께 눈물 흘리는 순간이라든가, 나뭇잎 위에서 눈부시게 춤추는 햇살에 흠뻑 빠져버린다든가, 두보의 시 구절에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불쑥 찾아오더라도 놀랄 필요 없다. 내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순간이다. 감정은 또다른 감정으로 치유하는 법이다.
5년이 흘렀다. 부실한 몸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쓸만하다. 대신 마음은 세파에 깎여서 많이 무디어졌다. 콧등을 때리는 바람이 유난히 차다. 오늘은 왠지 두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