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아픔 넘어 세계의 치유 성지로
2025년 06월 11일(수) 19:50
조선 후기 병인박해 등 탄압 속 1000여명 순교자 묻혀
2014년 故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해 세계인 이목 집중
교황청, 2020년 ‘국제 성지’ 공식 지정…아시아 2번째
디지털역사체험관·국제청소년센터 조성, 예술 행사 등
문화·관광·종교 아우르는 세계적 복합문화공간 진화중

해미국제성지 전경. <서산시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은 전 세계에 깊은 울림을 안겼다. 평생을 약자와 함께하며 평화와 사랑, 화해를 실천한 그의 삶은 한국에서도 깊은 의미로 남아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국제성지는 그 정신을 간직한 특별한 곳이다. 조선 시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이곳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국제성지’로 지정되며 평화의 상징이 됐다. 신앙의 역사를 품은 이곳은 이제 치유와 성찰, 공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으로 거듭나며, 누구나 잠시 멈춰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순교의 땅, 세계를 향한 성지가 되다

해미국제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병인박해 등 조선 후기의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순교자 1000여 명의 피가 이 땅에 스며 있다. 겉보기엔 평온한 언덕과 숲길이지만, 이곳은 오랜 시간 고통과 희생의 흔적을 간직한 성스러운 공간이다.

그 신앙적 가치를 인정한 교황청은 2020년 해미성지를 ‘국제성지’로 공식 지정했다. 이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사례이며, 아시아 전체로 봐도 단 두 번째다. 국제성지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순례와 기도를 위해 찾는 교황청 지정의 특별한 성지로,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성지를 직접 방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이곳에서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자라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메시지는 해미국제성지가 단지 고난을 기억하는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인류의 화합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할 미래의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해미성지에 설치된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과 초상화 앞에서 신자들이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김영태 기자
◇역사와 기술이 만난 공간, 디지털역사체험관

이러한 교황의 메시지를 되새기며 서산시는 해미국제성지를 더욱 체계적이고 현대적인 순례지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2023년 개관한 디지털역사체험관이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실감형 영상과 몰입형 콘텐츠로 체험할 수 있는 첨단 시설이다.

천장과 바닥, 벽면 등 공간 전체를 활용한 입체적 영상 콘텐츠는 관람객들에게 역사적 감동과 함께 성지의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순교자들의 삶을 디지털 예술로 재해석한 이 공간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신앙의 본질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해미성지의 자연 경관과 서산지역의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담아내 종교적 장소를 넘어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복합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청년에게 전하는 희망, Wake-up 국제청소년센터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에서 아시아 청년들을 향해 전한 “깨어 있는 모습으로 세상을 활기차게 만들라”는 말은 또 다른 공간으로 구체화됐다. 바로 Wake-up 국제청소년센터. 2023년 문을 연 이 센터는 전 세계 청소년이 함께 참여하고 교류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교황의 메시지를 실천하는 장이 되고 있다.

센터는 교황방문기념관, 공연장, 회의실, 숙박동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특히 교황이 실제 탑승했던 차량을 전시한 공간은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한다. 기념관 내부에는 미디어아트 홀과 체험형 콘텐츠를 배치해 청소년들이 즐겁게 신앙과 평화의 메시지를 체득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8월 이곳에서 열린 ‘해미 청년 문화예술제’에는 국내외 180여 명의 청년이 참여해 예술과 신앙, 평화를 주제로 교류하며 국제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4월 22일 충남 서산시 해미면 해미국제성지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미사. /김영태 기자
◇‘세계명소화’로 나아가는 해미국제성지

해미국제성지는 지금, ‘세계명소화’라는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산시는 해미국제성지를 세계적인 명소로 육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디지털역사체험관 조성 △Wake-up 국제청소년센터 설립 △교황 방문 10주년 기념 KBS 열린음악회 개최 등 문화·관광·종교를 아우르는 융복합 성지로 키우기 위한 다각적인 사업을 추진 중이다.

특히 2027년 서울에서 열릴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앞두고, 해미국제성지를 이 대회의 연계 순례지로 육성하기 위한 준비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를 위해 순례 방문자센터와 문화교류센터는 각각 2026년과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조성 중이다.

방문자센터에는 다국어 순례지원실, 휴게공간, 교황 기록전시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해외 순례객과 청년 방문객을 위한 기반 시설도 함께 확충된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국내 유일 국제성지로서 해미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교황님의 겸손한 사랑의 유산을 이어받아 세계 청년들과 함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나누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평화의 씨앗, 해미에서 세계로

해미국제성지는 단순한 종교 유적지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평화의 씨앗이 자라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 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겸손한 사랑이 뿌리내려 있다.

디지털 기술을 입은 역사 체험, 세계 청년과의 교류, 그리고 다가올 국제 행사를 위한 준비는 해미를 세계와 연결된 평화의 플랫폼으로 만들고 있다.

한 시대를 밝혔던 등불은 사라졌지만, 그 빛은 해미국제성지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 위에 피어난 사랑과 평화, 그리고 깨어 있는 청년들의 연대는 이제 이곳 해미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인근에 위치한 Wake-up 국제청소년센터 전경. 노을빛 아래 펼쳐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세계 청년들의 교류와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문화공간이다. <서산시 제공>
◇ 지역과 함께 숨 쉬는 성지…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 모색

해미국제성지는 종교와 역사, 예술과 기술을 아우르며 새로운 시대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산시는 성지의 활성화가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지역 상권과의 연계, 문화관광 기반 확충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해미읍성과 연계한 순례길 코스 개발, 지역 특산물과 연계한 순례자 마켓 조성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청년 예술인들에게 성지를 창작의 공간으로 개방해, 다양한 공연과 전시, 워크숍이 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실제로 디지털 체험관과 국제청소년센터에서는 음악, 무용, 미디어아트 등 다채로운 장르의 예술 활동이 펼쳐지고 있으며, 해미의 평화 메시지를 오늘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산시는 이러한 흐름이 단순한 종교 관광을 넘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문화·경제 생태계로 확장되길 기대하고 있다.

‘고난과 순교의 역사를 넘어, 오늘의 치유와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공간’.

해미국제성지는 이제 서산이라는 지역 도시가 세계와 연결되는 열린 관문이자, 대한민국이 세계에 제안하는 평화의 모델로 성장하고 있다.

/대전일보=정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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