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교회를 낳는 부흥의 역사 -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4년 11월 08일(금) 07:00 가가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도군로 1826에는 봉황교회라는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902년에 부해리((Henry Moro Bruen 1874-1959) 선교사와 구미 구평교회에 출석하던 김점권 등 몇 명이 설립한 곳이다. 그 교회에는 설립 후 몇몇 교역자들이 몇 년씩 목회를 하였는데 당시 평양신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소무열이라는 전도사가 목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전도사가 바로 나의 외할아버지시다. 바로 후임 목사로 부임한 분이 소도열 목사인데 평양신학교에서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공부를 하신 분이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목회를 하신 분인데 이분은 나의 작은 외조부가 되신다.
그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며 재미난 것을 보았는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이나 동리로 돌아가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봉황교회는 설립 초기 주변지역에 여러 개의 교회를 분립 개척했다. 1903년에는 김인옥과 이성준이 의성군에 쌍계교회를 개척했고, 1904년에는 최만화 등이 군위군 효령면에 내리교회를 설립했으며, 1906년에는 선산군 도개면(현 의성군 구천면)에 청산교회를 분립했다. 이때 세워진 청산교회가 바로 나의 외증조부 소명복 장로님이 세운 교회이다.
증조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다니시던 교회는 대사교회인데 이 교회가 바로 봉황교회에서 분립 개척한 쌍계교회의 교인 이이경이라는 분이 열심히 전도하여 1909년에 세운 교회이다. 안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대사교회로 가다 보면 대사 마을이 보이는 곳에 1996년 4월에 건립한 3·1만세운동 기념탑이 있다. 1919년 3월 15일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는데 증조할아버지가 참가하여 나의 아버지는 훗날 독립유공자 삼세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 재미난 것은 대사교회를 다니시던 아버지와 청산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시고 나와 나의 형제자매들이 태어난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35년생으로 동갑이시다. 부모님의 신앙은 이러한 토양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렇게 평생을 목회를 하며 전국에 교회를 세우시고 건축을 하셨다. 평생을 타지에서 지내시다 은퇴를 하시고 대사교회가 있는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사를 하셨다.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조차 흐릿하시고 말씀조차 하시기 힘들어 하시며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신다. 이 요양원 자리는 할아버지께서 그 동리에 초등학교가 세워질 때 땅을 기증하였던 곳이고 오래전에 아이들이 없어 폐교가 되었고 이제는 요양원이 들어섰는데 그곳에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되었다.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 없었던, 배낭에 두 벌 옷이 없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를 하면서도 그 어떤 뒷배가 되어주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그리 존경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의 연수가 늘어나고 현실의 장벽에 부딪힐 때 아버지를 떠 올리게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가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없어야 주시지 있으면 안 주신다.”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키우며 양식이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걱정되고 두려웠겠는가. 지금은 없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지탱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경험들이 더 큰 믿음을 만들어 내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 목회자의 삶이나 교회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과 희생을 되새겨보며 교회들은 부족하여서 더 채워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이러한 신앙이야 말로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해 보인다. 먼저 믿은 사람들을 통해 교회가 교회를 낳는 것이 당연했고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성장했고 부흥했던 것이었다.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 없었던, 배낭에 두 벌 옷이 없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를 하면서도 그 어떤 뒷배가 되어주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그리 존경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의 연수가 늘어나고 현실의 장벽에 부딪힐 때 아버지를 떠 올리게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가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없어야 주시지 있으면 안 주신다.”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키우며 양식이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걱정되고 두려웠겠는가. 지금은 없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지탱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경험들이 더 큰 믿음을 만들어 내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 목회자의 삶이나 교회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과 희생을 되새겨보며 교회들은 부족하여서 더 채워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이러한 신앙이야 말로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해 보인다. 먼저 믿은 사람들을 통해 교회가 교회를 낳는 것이 당연했고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성장했고 부흥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