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라 비 앙 로즈
2024년 06월 28일(금) 11:05
<15>장밋빛 유리, 깨질듯한 고통의 삶
프랑스 샹송 여제 ‘에디트 피아프’ 비극적 삶 극화

레이몽 아소는 피아프가 ‘ABC 뮤직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그녀는 단순한 캬바레 가수에서 프랑스 세기의 샹송 가수로 불리는 등, 삶의 변화를 겪는다.

오래된 녹음본이 열화한 듯한, 레코드 바늘이 엘피판을 긁는 것 같은 감각. ‘샹송 여제’로 칭송받는 에디트 피아프의 ‘라 비 앙 로즈’를 듣고 있으면 악곡 한편에서 비장미가 느껴진다.

감미로운 세레나데에서 부정적 악상이라니, 의아할 수 있지만 노래 저변에는 분명 감춰진 우울감이 있다. 기쁨과 슬픔에 발을 반씩 걸친 야누스적 감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올리비아 다한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무지카 시네마(음악 영화) ‘라 비 앙 로즈’에 그 해답이 있는 것 같다. 최근 고화질로 리마스터 된 작품은 프랑스 국민 가수 에디트 피아프(마리옹 꼬띠아르 분)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다.

개봉 당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런던·LA 비평가 협회상을 석권할 만큼 이목을 끌었으며 현재 웨이브, 시리즈온 등 OTT 플랫폼에서 상영 중.

에디트의 목소리에 반한 클럽 사장 루이스 레플리는 그녀에게 ‘작은 참새’라는 의미의 활동명을 선물한다. 이후 피아프는 클럽에서 데뷔 무대를 치렀지만, 레플리가 살해되면서 절망에 빠진다.
영화는 피아프의 고통스러운 성장 과정을 초점화한다. 파리지엥 특유의 천진, 명랑과는 거리 먼 유곽의 데카당티즘(퇴폐)으로 가득 차 있다.

유년 시절 피아프의 어머니는 캬바레 가수였고 아버지는 서커스 곡예사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손을 떠나 매음굴을 운영하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래도 피아프, 아니 ‘에디트 지오반나 가숑(피아프의 본명)’은 세간의 별칭과 같이 ‘작은 참새(Piaf·작은 참새)’처럼 비상하려 애쓴다. 신장 147cm에 불과한 단신에 곡절을 거치고, 유럽 음단에서 데뷔 무대를 치른 그녀가 자못 놀랍다.

영화는 효과적인 카메라 워킹을 활용한다. 작중 1959년 뉴욕에서 빌리 홀리데이 음반에 대해 언급하는 ‘성공한 피아프’와, 1940년 멍든 눈을 감싸는 ‘유년기 피아프’는 교차 편집됐다. 두 이미지를 병치하는 오버랩이 아니라 교대로 상을 보여준 데에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이미지를 단순히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절망과 환희를 대조시켜 비극성을 깊게 투시하려는 의도다.

다한 감독은 전반부를 비극, 후반부를 행복으로 장식하는 선형적 플롯을 지양했다. 피아프의 화려한 현재 모습을 보여주되 네 번의 교통사고, 연인의 죽음, 유치장 신세, 결혼과 이혼 등 경험을 끌어와 하나씩 큐레이션 하는 방식을 차용했다. 전기적 작품임에도 과거 기억의 단편 중 클라이막스를 하나씩 ‘열람’하는 듯한 전개 방식은 몰입감을 더한다.
성공을 거둔 피아프는 가장 무도회에 참여해 자신의 기량을 선보인다. 빈민가 유곽을 전전하던 그녀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어느 순간부터 삶의 주인공이 된다.


작중 피아프는 총 세 번의 행복을 마주한다. 하나는 에디트의 목소리에 반한 클럽 사장 ‘루이스 레플리’가 활동명을 선사하고 클럽 데뷔무대를 마련해준 일, 다른 하나는 프랑스 최고 시인 ‘레이몽아소’에게 발탁돼 그의 시를 노래로 불렀던 일이다. 아울러 미들급 권투 챔피언 막셀 세르당에게 사랑에 빠졌던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들은 모두 ‘위기’와 맞물려 있다. 레플리는 돌연 살해당해 클럽 공연은 무산됐고, 레이몽아소와는 이별했으며 세르당은 대서양 너머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숨진다. 허나 피아프는 역설적이게도 세르당 사망 이후 ‘사랑의 찬가’를 작곡했고, 찬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녀를 스타덤에 올렸다. 비극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던 프리다 칼로, 베토벤, 고흐 등 예술가들의 면면이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이쯤에서 피아프의 삶을 ‘트레몰로’에 유비하고 싶다. 떨림 음을 되풀이하는 주법 트레몰로는 행복과 고통을 진자운동 하던 그녀의 삶과 일견 닮아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1960년 올랭피아 극장에서 부른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에는 이런 노랫말이 등장한다. “사랑도 그 ‘트레몰로’도 모조리 청산해 버리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사교회에서 ‘라 비 앙 로즈’를 부르는 에디트 피아프의 모습.
한 사람의 인생을 추적하는 전기 영화에서 관객들은 어떤 씬에서 고양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도 피아프의 비극적 페이소스가 환희의 순간으로 변모하는, 그녀 마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일 지도 모른다.

피아프는 자신의 감정 변화를 선명하게 마주한다. 꿈에 그리던 극장 공연을 위해 군중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윽고 그녀의 삶에 조그만 숨구멍이 뚫리더니 희비극의 양면 태가 공존하기 시작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저서 ‘혐오와 수치심’에서 자아가 형성되는 데 필요한 핵심적 감정이 ‘애증 병존’이라 언급했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이 겹친 감각은 인간을 슬프고도, 찬란하게 만든다.

영화를 끄고 ‘라 비 앙 로즈’에 귀 기울인다. 뜻 모를 불어들이 여전히 아름답다. 곡목 ‘La vie en rose’는 ‘장밋빛 유리를 통해 본 인생’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샹송 계에 음악적 유산을 남긴, 이 작디작은 캬바레 싱어의 삶이 잿빛이라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을 ‘장밋빛 인생’이라 칭해보고 싶다. 절망을 희망으로 돈호하는 순간, 우리는 피아프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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