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어떤 귤
2021년 04월 29일(목) 23:00 가가
며칠 전 제주에서 귤을 사왔다. 맛은 좋았지만 귤껍질 깔 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윗부분은 그런대로 까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껍질이 속살과 붙어 있어서, 까면 깔수록 속살이 무더기로 터져버렸다. 껍질을 까던 손은 금세 과즙에 젖어 끈적끈적해지고, 바닥은 누런 액체들로 엉망이 되었다. 처음엔 당혹스럽고 황당했다. 하지만 한 번 당한 뒤로, 귤을 먹으려 할 때마다 짜증도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 남은 것들은 어떻게든 먹어서 해치울 수밖에.
마침내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잊지 말자는 의미로 그놈은 껍질의 잔해를 버리지 않고 책상 한 구석에 놔두었다. 그렇게 보름 이상을 잊고 지내다가, 조금 전 우연히 바로 그 귤껍질이 눈에 들어왔다. 바싹 말라 돌처럼 딱딱해진 그것은 ‘내가 언제 그랬어?’ 하는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날 쳐다보고 있다.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껍질 까기가 몹시 고약한 이런 귤을 대할 때의 감정은 일상적인 분노를 대하는 우리들의 감정과 매우 비슷하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쳐낼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일상적 분노, 즉 스트레스이다. 일회적이고도 우연한 분노와 달리 일상적인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서 맥락도 없이 분출되기도 하고, 사소한 언쟁만으로도 심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일상적 분노는 천천히 안으로 잦아 들어가기 마련이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남의 분노는 물론, 자신의 분노도 잘 포착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비록 분노하는 나 자신을 무척 힘들게 할지라도, 분노는 어디까지나 내가 만든 감정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이 사실 속에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열쇠가 있다. 분노를 실체화하고 분노의 원인을 외부의 대상과 일치시키는 발상, 그러니까 분노를 내가 만든 감정이 아닌 내 마음 밖의 그 무엇으로 간주하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분노를 지속시키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분노의 원인이 다양한 조건들 속에서 탄생한다면, 분노의 지속은 어디까지나 주로 나의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 설령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분노를 유발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림이 마땅하다. 분노 역시 자비심으로 다스려야 한다. 일상적으로 나에게 증오심을 안기는 이가 있다고 치자.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 사람의 행복을 간절하게 빌어 보자. 기도하는 동안만큼은 너무도 진실된 마음으로 빌어 보자. 역겹고 힘들어도 참고 노력해 보자. 그러면 내 안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런다고 분노가 봄날 눈 녹듯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눈앞에 없을 때는 어느 정도 분노를 다스릴 수 있겠지만, ‘원인 제공자’가 눈앞에 있으면 분노는 다시 고개를 쳐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두번째 지침이 필요하다. 분노를 유발하는 언행들은 숱한 인연과 조건들이 날실과 씨실로 뒤엉키는 교차점 위에서 탄생한다. 한 사람에게 고착된 인격과 개성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복잡다단한 상호작용의 소산이다. 이 모든 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비가 온다”라는 말에 ‘비’라고 하는 실체가 따로 있으며 그 비가 나에게 오고 있는 형상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정한 상황을 지칭하며 “비가 온다”라고 말할 뿐, 그 상황 어디에도 ‘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의 원인을 따지고, 타인과 주변 나아가 세상과 사회만을 탓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극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단세포적 존재로 폄하하는 처사이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리고, 상황은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이 진리를 통찰하는 지혜이자 화를 다스리는 비결이다. 분노를 무력화하려면 분노의 원인을 찾기보다 감정의 일종으로 분노를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노가 탄생한 상황을 살피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 할 일이다.
어쩌다 껍질 까기 고약한 귤을 만나, 익숙하지만 낯선 내 안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귤껍질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림이 마땅하다. 분노 역시 자비심으로 다스려야 한다. 일상적으로 나에게 증오심을 안기는 이가 있다고 치자.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 사람의 행복을 간절하게 빌어 보자. 기도하는 동안만큼은 너무도 진실된 마음으로 빌어 보자. 역겹고 힘들어도 참고 노력해 보자. 그러면 내 안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런다고 분노가 봄날 눈 녹듯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눈앞에 없을 때는 어느 정도 분노를 다스릴 수 있겠지만, ‘원인 제공자’가 눈앞에 있으면 분노는 다시 고개를 쳐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두번째 지침이 필요하다. 분노를 유발하는 언행들은 숱한 인연과 조건들이 날실과 씨실로 뒤엉키는 교차점 위에서 탄생한다. 한 사람에게 고착된 인격과 개성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복잡다단한 상호작용의 소산이다. 이 모든 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비가 온다”라는 말에 ‘비’라고 하는 실체가 따로 있으며 그 비가 나에게 오고 있는 형상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정한 상황을 지칭하며 “비가 온다”라고 말할 뿐, 그 상황 어디에도 ‘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의 원인을 따지고, 타인과 주변 나아가 세상과 사회만을 탓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극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단세포적 존재로 폄하하는 처사이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리고, 상황은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이 진리를 통찰하는 지혜이자 화를 다스리는 비결이다. 분노를 무력화하려면 분노의 원인을 찾기보다 감정의 일종으로 분노를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노가 탄생한 상황을 살피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 할 일이다.
어쩌다 껍질 까기 고약한 귤을 만나, 익숙하지만 낯선 내 안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귤껍질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