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욕망은 편안합니까?
2020년 12월 31일(목) 11:00 가가
애플 워치는 매일 나에게 하루 운동 목표, 하루 칼로리 소비 목표, 하루 일어서기 목표를 제시한다. 목표를 달성한 날은 마음이 홀가분하다. 하지만 목표를 채우지 못한 날들이 훨씬 더 많다. 핑곗거리가 될 만한 명분이 있는 날은 목표에 못 미치는 수치를 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핑곗거리가 없는 날은 ‘내일은 꼭…’ 하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신공을 발휘한다. 문제는 어제 같은 날이다. 나름 열심히 걸었다. 당연히 오늘 목표는 달성했을거라 생각했는데, 잘 시간이 되어도 목표치가 간당간당하게 턱걸이다. 자지도 못하고 투덜투덜하며 방안을 왔다 갔다 걸었다. 손목시계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눈에 빤히 보이는 수치에 옴짝달싹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과감하게 무시하지도 못한다.
애초에 애플 워치는 혈압을 재기 위해 샀는데 그런 기능은 지원되지 않았다. 사고 나서 보니 내가 산 이유는 ‘그냥’ 사고 싶어서 산 것이었다. 혈압을 재겠다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명분이었다. 어쨌든 실제로는 하루 운동량을 점검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건 생각지도 않은 용도다. 덕분에 어제처럼 내가 정하지도 않은 하루 운동량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애플 워치에 구속되어 사는 셈이다. 그런데 누가 나의 삶을 구속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 이외엔 없다.
목표란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한 구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가 없는 삶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목표란 과거의 내 안에서 요동쳤던 욕망의 흔적, 욕망의 잔재, 욕망의 껍데기이다. 과거의 욕망이 현재의 나를 구속한다. 현재의 욕망이 미래의 나를 구속한다. 구속되는 나는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를 욕망하고, 욕망은 목표를 만들고, 목표는 다시 나를 구속한다. 목표가 없는 삶은 타인과 비교해 봐도 두말할 것 없이 꿀린다. 뒤처지는 느낌은 더더욱 나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은 현재의 나를 채찍질한다. 불안이 만든 상처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고통의 자리에서 욕망이 꿈틀거리며 자라난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불안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이 불안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불안한 것은 인간에게는 존재해야 할 이유, 사명, 목표 같은 것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의자는 사람이 앉는 것, 침대는 사람이 자는 것이라는 그 나름의 본질이 있다. 즉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사람이 특정한 용도를 위해 애초부터 그렇게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사과는? 인간은 사과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사과라고 불리는 순간, 그 무엇인가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부여된다. 사과는 인간에게 먹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부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주변 모든 것을 대상화한다. 즉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대상화하는 것은 욕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나 정작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의 이유가 없다. 인간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보니 어떻게든 존재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했듯 자신에게도 목표와 존재 이유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도 대상화한다. 자신을 대상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비교를 통한 객관화이다. 그러니까 나는 키가 165센티미터다. 나는 차가 있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이런 식이다. 인간이 주변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심지어 자신까지 대상화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이미 불안이다. 우리네 삶 자체가 고통이다.
내가 한낱 손목시계 같은 것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 불안한 욕망 때문이다. 도대체 사는 게 뭔지, 왜 사는 건지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질문의 대상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하는 자신을 찬찬히 느껴 보라. 그게 답이다.
의자는 사람이 앉는 것, 침대는 사람이 자는 것이라는 그 나름의 본질이 있다. 즉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사람이 특정한 용도를 위해 애초부터 그렇게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사과는? 인간은 사과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사과라고 불리는 순간, 그 무엇인가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부여된다. 사과는 인간에게 먹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부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주변 모든 것을 대상화한다. 즉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대상화하는 것은 욕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나 정작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의 이유가 없다. 인간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보니 어떻게든 존재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했듯 자신에게도 목표와 존재 이유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도 대상화한다. 자신을 대상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비교를 통한 객관화이다. 그러니까 나는 키가 165센티미터다. 나는 차가 있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이런 식이다. 인간이 주변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심지어 자신까지 대상화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이미 불안이다. 우리네 삶 자체가 고통이다.
내가 한낱 손목시계 같은 것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 불안한 욕망 때문이다. 도대체 사는 게 뭔지, 왜 사는 건지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질문의 대상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하는 자신을 찬찬히 느껴 보라. 그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