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중국 서안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는 “그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한탄했다. 대한민국이 참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김구의 불길한 예감처럼 광복 후 정국을 외세가 주도한 결과 남북한은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분단 후 남북한은 체제 경쟁을 전개했는데, 북한은 역사학을 체제 경쟁의 주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1946년 7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학자들을 초빙했고, 이에 응해서 박시형·전석담·김석형 등의 학자들이 월북했다. 광복 직후 남한의 역사학계에는 세 부류의 역사학자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추구하던 사회경제사학자들로서 이들이 대거 월북해 북한 역사학계를 형성했다. 또 하나는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등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었는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이들은 6·25전쟁 와중에 납북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남한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출신이었던 이병도·신석호 등만 남아서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북한은 1947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기관지 ‘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를 발간했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1949년 ‘력사제문제’에 기고한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에는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인식이 잘 담겨 있다. 홍기문은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후 “조선 역사에 대하여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면서 일제가 만든 역사학을 정리했다. “첫째 (서기)전 1세기에서 4세기까지 약 5백 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 삼아서 한인(漢人)의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둘째 신라·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加羅)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윗글처럼 홍기문은 제국주의 역사학의 중심이 첫째 ‘낙랑군=평양설’이고 둘째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가야=임나설’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숱한 토론회를 개최했고, 1958년경부터는 리지린을 북경대 대학원에 유학 보내 고사변학파(古史辨學派)의 중심 인물인 고힐강(顧詰剛)의 지도로 고조선사를 연구하게 했다. 리지린은 1961년 8~9월에 열린 ‘고조선에 관한 과학 토론회’에 참석해 그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데 이를 계기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고 ‘낙랑군=요동설’이 대세가 되었다. 리지린이 1962년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연구’를 출간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은 완전히 폐기되고 ‘낙랑군=요동설’이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김석형은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가 아니라 일본 열도에 있었던 한반도 계통의 소국이란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분국설’을 발표해서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반면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장악한 남한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에서 날조한 ‘낙랑군=평양설’과 ‘임나=가야설’을 아직도 ‘정설’(定說)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북한에서는 56년 전인 1962년에 해체시킨 식민사학의 두 이론이 여전히 ‘정설’이란다. 광복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식민사학을 ‘정설’이라고 우기는 남한 학자들과 이런 학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남한 사회를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식민사학이야말로 남한 사회의 가장 오랜 적폐인데, 촛불로 탄생했다는 새 정권 출범 1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식민사학 적폐 청산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새 정권 들어서 거꾸로 식민사학이 제 세상 만난 듯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의 말을 ‘역사를 잊은 정권에게 미래는 없다’로 바꾸어도 정확하게 들어맞음을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보여 주었다. 문재인 정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경제 문제와 함께 식민사학 적폐 청산 여부다. 경제 문제 해결은 난제지만 식민사학 적폐는 정권의 의지만 있으면 온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청산할 수 있는 문제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