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생각’] 사라진 전설과 인문학, 그리고 나무
2018년 03월 15일(목) 00:00 가가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향기를 찾으려면, 나무와 더불어 그 곁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을 만나야 한다. 경북 상주의 사백 년 된 소나무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처음 나무를 찾아가서 팔순 넘은 노인에게 나무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을 들었다.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은, 나뭇가지를 꺾는다거나 줄기 껍질을 벗겨 내는 식으로 나무에 해코지를 하면 큰 벌을 받는다거나, 나무 안에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으니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그동안 알고 있던 흔한 전설과는 사뭇 달랐다.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 솔잎을 주워 가기만 해도 천벌을 받는데, 그것도 삼대에 이어진다는 조금은 살벌한 전설이다. 곰곰 톺아보면 매우 슬기로운 자연주의적 지혜가 담긴 전설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침내 나무에 좋은 거름이 될 솔잎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천벌이 삼대에 이어진다는 것도 그렇다. 자신이 받을 천벌 정도는 각오하고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게 가난하던 시절 우리네 부모의 남루하지만 고귀한 삶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자식들이 대를 이어 천벌을 받게 할 부모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을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지혜로운 뜻을 담은 전설이다.
몇 해쯤 지난 뒤에 다시 이 소나무를 찾았다. 고작 이태쯤 지난 뒤였지만, 마을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나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노인의 허름한 집은 근사한 양옥으로 바뀌었고, 마을 회관도 새 단장을 했다. 그리고 조근조근 전설을 이야기하던 노인은 그새 세상을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래된 나무에 얽힌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당연히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분을 찾아야 한다. 연세가 많은 분들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죽음에 가까운 분들이다. 이 마을에서처럼 처음에 나무 곁에서 나무 이야기를 전해 준 노인을 다음에 찾았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경우는 자주 겪게 되는 일이다.
노인의 부고를 씁쓸히 되새기며 나무 곁에 서면 나무는 돌아가신 노인의 분신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나무 곁에 머무르면 나무줄기에서 노인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아 사람의 향기와 무늬를 그대로 전해 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상주의 그 작은 마을에서 나무의 전설을 마을 어른들로부터 전해 듣고 싶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 누구도 그 전설을 또렷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한 노인이 겨우 어디서 들은 듯하다는 식의 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전설이 사라졌다. 선조의 지혜에 대해 그토록 감탄하게 했던 전설이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설과 함께 나무 안에 담겨 오래도록 전해 온 삶의 가치도, 사람살이의 향기도,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살림살이의 무늬도 더불어 희미해졌다.
“신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짚어 보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 비교신화 학자 조지프 캠벨(1904∼1987)의 말이다. 신화란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실현해야 할 삶의 가치를 담고 인구에 회자한 이야기, 즉 사람살이의 진정한 가치를 담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신화와 전설을 잃어 가는 이 시대에 재우쳐 나무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옛 사람살이의 자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마을 노인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살아온 사람살이의 무늬를 살려 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삶의 가치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옛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삶의 가치, 사람살이의 무늬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며, 지금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문학적 과제다.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사람살이가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인문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 걱정스러운 것은 과연 사람살이에 얼마나 다가서 있느냐에 대한 회의가 있어서다. 현장의 삶에서 떨어진 지식 유희 혹은 언어유희에 치우친 책과 강연이 넘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인문학은 이 땅의 사람들이 남긴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말로만 되는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달리 말하자면 언어유희로 인문학 과제를 이룰 수 없다는 얘기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천년을 사는 나무는 사람살이의 무늬를 담는 대표적인 자연물이다. 지금 나무 곁에 봄바람이 스민다. 나무에 다가가 나무가 전해 주는 옛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나무 칼럼니스트〉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은, 나뭇가지를 꺾는다거나 줄기 껍질을 벗겨 내는 식으로 나무에 해코지를 하면 큰 벌을 받는다거나, 나무 안에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으니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그동안 알고 있던 흔한 전설과는 사뭇 달랐다.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 솔잎을 주워 가기만 해도 천벌을 받는데, 그것도 삼대에 이어진다는 조금은 살벌한 전설이다. 곰곰 톺아보면 매우 슬기로운 자연주의적 지혜가 담긴 전설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침내 나무에 좋은 거름이 될 솔잎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노인의 부고를 씁쓸히 되새기며 나무 곁에 서면 나무는 돌아가신 노인의 분신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나무 곁에 머무르면 나무줄기에서 노인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아 사람의 향기와 무늬를 그대로 전해 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상주의 그 작은 마을에서 나무의 전설을 마을 어른들로부터 전해 듣고 싶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 누구도 그 전설을 또렷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한 노인이 겨우 어디서 들은 듯하다는 식의 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전설이 사라졌다. 선조의 지혜에 대해 그토록 감탄하게 했던 전설이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설과 함께 나무 안에 담겨 오래도록 전해 온 삶의 가치도, 사람살이의 향기도,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살림살이의 무늬도 더불어 희미해졌다.
“신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짚어 보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 비교신화 학자 조지프 캠벨(1904∼1987)의 말이다. 신화란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실현해야 할 삶의 가치를 담고 인구에 회자한 이야기, 즉 사람살이의 진정한 가치를 담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신화와 전설을 잃어 가는 이 시대에 재우쳐 나무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옛 사람살이의 자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마을 노인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살아온 사람살이의 무늬를 살려 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삶의 가치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옛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삶의 가치, 사람살이의 무늬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며, 지금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문학적 과제다.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사람살이가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인문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 걱정스러운 것은 과연 사람살이에 얼마나 다가서 있느냐에 대한 회의가 있어서다. 현장의 삶에서 떨어진 지식 유희 혹은 언어유희에 치우친 책과 강연이 넘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인문학은 이 땅의 사람들이 남긴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말로만 되는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달리 말하자면 언어유희로 인문학 과제를 이룰 수 없다는 얘기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천년을 사는 나무는 사람살이의 무늬를 담는 대표적인 자연물이다. 지금 나무 곁에 봄바람이 스민다. 나무에 다가가 나무가 전해 주는 옛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