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생각’]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답다
2018년 02월 08일(목) 00:00 가가
입춘이 며칠 지났다는 걸 의식했기 때문일까. 도시의 아파트 울타리를 둘러선 개나리 가지 위에 돋아난 꽃눈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에도 따스한 볕이 며칠 이어질라치면 노란 꽃을 피우는 철부지 나무이건만,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지낸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모양이다. 다가오는 봄의 발걸음을 분명하게 알아채고, 비로소 본격적으로 봄을 채비하는 중이다.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산수유의 안부도 궁금했다. 발맘발맘 산수유 앞으로 다가섰다. 산수유 나뭇가지에도 갈색 꽃봉오리가 송알송알 솟아올랐다. 바람 차가워도 나무들에는 봄 마중 채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산수유 꽃봉오리 한 알갱이의 지름은 고작해야 8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가늣한 나뭇가지와 빛깔마저 비슷해서 엔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꽃봉오리다.
식물 공부 가운데에 눈에 띄지 않는 걸 찾아봐야 하는 학습 과정이 있다. ‘겨울눈 관찰’이 그것이다. 꽃도 열매도 잎도 없는 겨울에 움튼 꽃눈이나 잎눈을 관찰하면서 나무의 종류를 구별하는 과정인데, 초심자는 물론이고, 식물 전공자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공부에 속한다. 오로지 활짝 피어날 채비를 하는 중인 눈의 상태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모양을 판단해야 하는 어려운 학습 과정이다.
대개의 눈이라는 게 고작해야 밀리미터 단위의 작은 크기일 뿐 아니라, 그 모양도 비슷비슷해서 얼핏 봐서는 그 정체를 가늠할 수 없다. 겨울눈을 효과적으로 관찰하려면 우선 작은 눈의 껍질에 털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본다. 또 무늬와 결각처럼 눈에 보이는 부분을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또 오랜 식물 관찰 경험과 식물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눈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인내와 혜안이 필요하다.
아직은 데면데면한 산수유 꽃봉오리를 한참 바라보면서, 작은 꽃봉오리 안쪽을 상상해 본다. 지금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꽃봉오리의 속내다. 아무런 말도 소리도 없고, 심지어 미세한 떨림조차 드러나지 않지만, 산수유 꽃봉오리는 이 땅의 봄을 재우치며 개화의 고통 혹은 해산의 통증으로 꿈틀거린다. 입춘 즈음이면 언제나 되풀이되는 산수유의 생명살이 과정이다.
산수유 꽃봉오리는 이제부터 느리지만 뚜렷하게 봄이 오는 과정을 보여 줄 것이다. 매운바람 지나가고 바람결에 봄볕 스미기 시작하면 작은 알갱이의 껍질은 우선 넷으로 쪼개질 것이다. 처음에야 그저 가는 틈만 생긴다. 며칠 더 따스한 볕 내려오면 네 갈래의 틈이 벌어지고 급기야 하늘 향해 솟은 꽃봉오리 알갱이의 안쪽에서 노란빛이 얼비칠 것이다. 꽃송이는 하나가 아니다. 8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구슬 모양의 꽃봉오리 껍질 안쪽에는 작게는 스무 송이에서 많은 경우는 무려 마흔 송이의 꽃송이가 옹기종기 모여 법석을 벌인다. 봄 햇살 맞으려는 생명 본능의 안간힘이다. 다시 며칠 뒤에는 갈색의 딱딱한 껍질이 화들짝 젖혀지면서 샛노란 꽃송이가 일제히 튀어나온다.
이른 봄 환희의 빛으로 피어나는 산수유 꽃송이는 물론 멀리서 바라보아도 더없이 찬란한 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봄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단박에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산수유 꽃송이에 한걸음 더 다가서면 봄의 환희는 한층 깊어진다. 한데 모여 피어난 마흔 송이의 꽃송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꽃송이마다 3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꽃잎이 넉 장씩 들어 있다. 꽃잎 안쪽에는 네 개의 수술이 모여 있고, 가운데에는 하나의 암술이 삐죽이 돋아난다. 모두 똑같다. 작지만 엄밀한 생명의 규칙이 담겨 있다. 앙증맞은 꽃송이가 보여 주는 생명의 규칙이어서 더 신비롭다.
오래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옳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살을 에는 바람에 자꾸만 얼굴을 옷깃에 파묻게 되는 입춘 즈음,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무가 가만가만 말을 건넨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사람의 마을에 찬란한 봄이 오려면 아직은 더 많은 찬 바람을 스쳐 보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 땅의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 봄을 부지런히 준비하는 중이다.
다가오는 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매운바람에 맞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인내와 혜안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나무 칼럼니스트〉
식물 공부 가운데에 눈에 띄지 않는 걸 찾아봐야 하는 학습 과정이 있다. ‘겨울눈 관찰’이 그것이다. 꽃도 열매도 잎도 없는 겨울에 움튼 꽃눈이나 잎눈을 관찰하면서 나무의 종류를 구별하는 과정인데, 초심자는 물론이고, 식물 전공자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공부에 속한다. 오로지 활짝 피어날 채비를 하는 중인 눈의 상태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모양을 판단해야 하는 어려운 학습 과정이다.
산수유 꽃봉오리는 이제부터 느리지만 뚜렷하게 봄이 오는 과정을 보여 줄 것이다. 매운바람 지나가고 바람결에 봄볕 스미기 시작하면 작은 알갱이의 껍질은 우선 넷으로 쪼개질 것이다. 처음에야 그저 가는 틈만 생긴다. 며칠 더 따스한 볕 내려오면 네 갈래의 틈이 벌어지고 급기야 하늘 향해 솟은 꽃봉오리 알갱이의 안쪽에서 노란빛이 얼비칠 것이다. 꽃송이는 하나가 아니다. 8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구슬 모양의 꽃봉오리 껍질 안쪽에는 작게는 스무 송이에서 많은 경우는 무려 마흔 송이의 꽃송이가 옹기종기 모여 법석을 벌인다. 봄 햇살 맞으려는 생명 본능의 안간힘이다. 다시 며칠 뒤에는 갈색의 딱딱한 껍질이 화들짝 젖혀지면서 샛노란 꽃송이가 일제히 튀어나온다.
이른 봄 환희의 빛으로 피어나는 산수유 꽃송이는 물론 멀리서 바라보아도 더없이 찬란한 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봄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단박에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산수유 꽃송이에 한걸음 더 다가서면 봄의 환희는 한층 깊어진다. 한데 모여 피어난 마흔 송이의 꽃송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꽃송이마다 3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꽃잎이 넉 장씩 들어 있다. 꽃잎 안쪽에는 네 개의 수술이 모여 있고, 가운데에는 하나의 암술이 삐죽이 돋아난다. 모두 똑같다. 작지만 엄밀한 생명의 규칙이 담겨 있다. 앙증맞은 꽃송이가 보여 주는 생명의 규칙이어서 더 신비롭다.
오래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옳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살을 에는 바람에 자꾸만 얼굴을 옷깃에 파묻게 되는 입춘 즈음,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무가 가만가만 말을 건넨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사람의 마을에 찬란한 봄이 오려면 아직은 더 많은 찬 바람을 스쳐 보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 땅의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 봄을 부지런히 준비하는 중이다.
다가오는 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매운바람에 맞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인내와 혜안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