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는 ‘후삼국’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있다.

신라 말기 진성왕 6년(892) 견훤이 후백제 왕이라고 일컫고, 궁예가 신라 효공왕 5년(901) 고려(후고구려) 왕을 칭해서 신라와 함께 후백제·후고구려가 세워진 때였다. 이때는 이미 백제·고구려가 신라에게 멸망한 지 230년 이상 지난 때였다.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런 나라들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물리적으로 통일했지 화학적 통합은 전혀 이루지 못했음을 뜻한다.

백제는 의자왕 20년(600)에 도성이 함락되었고, 663년에 백강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전하면서 완전히 망했다. 의자왕은 660년 나당 연합군이 부여성에 다가오자 웅진성으로 도주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을 거느리고 항복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의 태자 법민(문무왕)이 부여 융을 말 아래 무릎 꿇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서 옥중에 묻었는데, 이것이 20년 동안 나를 마음 아프고 골치 썩게 했다. 오늘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라고 모욕했다고 전한다.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였다’는 법민의 말은 18년 전인 의자왕 즉위 다음 해(642년) 발생한 사건을 말한 것이다. 의자왕이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자 성주 김품석(金品錫)과 그 부인 고타소가 자살하는데, 고타소가 태종무열왕의 딸이자 법민의 누이였다.

법민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도 마찬가지였다. 무열왕은 승전 잔치 때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자신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혔다. 심지어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했으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백제 장군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 운동에 나선 것이다. 흑치상지는 소정방에게 항복했는데, 소정방은 의자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했다. 이에 분개한 흑치상지가 장수 10여 명과 함께 도주해 백제 부흥의 기치를 들자 열흘이 되지 않아서 3만 군사가 모였고, 200여 성을 회복했다.

태종무열왕의 딸이자 법민(문무왕)의 누이인 고타소가 두 나라의 전쟁 와중에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은원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백제 장군 윤충이 고타소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라 왕실은 이를 개인적 은원으로 해석했고, 망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2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후백제·후고구려가 다시 등장했던 것이다.

견훤과 왕건이 신라를 대하는 태도는 아주 달랐다. 견훤은 신라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신라 경애왕 4년(927)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그 왕비를 취했으며 부하들이 경애왕의 비첩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사건으로 신라인들은 후백제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 반감은 왕건에 대한 호의로 이어졌다.

반면 왕건은 경순왕 5년(931)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을 방문해 극진한 예의를 다했고, 휘하 군사들에게도 일체의 노략질을 모두 금지시켰다. 신라 남녀들이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왕건)이 오니 부모를 보는 것 같다”면서 왕건에게 대거 귀부(歸附)했다. 김부식이 신라인의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견훤이 신라인의 마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 평창동계올림픽의 남북 단일팀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공방도 여기에서 크게 멀지 않다. 심지어 남북 단일팀 구성도 반대한다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북한의 정치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극단적 대결 및 전쟁 구도로 갈 수는 없다. 왕건의 길, 즉 북한인들의 마음을 얻는 길이 짧게는 평화로 가는 길이자 멀게는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 준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