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생각’]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이 말하는 나무
2018년 01월 11일(목) 00:00 가가
눈보라 몰아치는 바람 찬 들녘에 사람이 남긴 온갖 말들이 사라지고 말 없는 나무만 홀로 남았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몸을 움츠린 고요의 계절, 나무는 매운바람에 맨살을 드러냈다. 말없이 서 있는 나무라고 해서 찬 바람 눈보라가 반가울 리 없다. 땅속 깊이 파고들어 추위를 피하는 짐승들에 비하면 한번 뿌리내린 자리에서 평생을 꼼짝하지 못하고 사는 나무에게 겨울은 훨씬 더 혹독한 계절이다.
나무는 겨울을 말없이 그러나 어느 계절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봄맞이 채비를 재우쳐야 한다. 이 땅의 어느 생명보다 앞서서 봄을 맞이해야 한다. 연초록 이파리를 피워 올려 봄이 우리 곁에 다가왔음을 알려야 하는 건 언제나 나무의 몫이다.
그 파란 잎을 피우기 위해 나무는 찬 바람 속에서도 차근차근 채비해야 한다. 지나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공연히 서둘렀다가는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없지만, 나무는 이 땅의 여느 생명보다 겨울을 치열하게 보내는 중이다.
잎 나기 전에 꽃부터 먼저 피우는 나무도 적지 않다. 목련이 그렇고 산수유가 그렇다. 일찌감치 봄을 알리는 꽃들이 대개 그렇다. 목련은 지난봄에 꽃 떨구면서 곧바로 꽃봉오리를 맺었다. 처음부터 겨울 추위에 대비해 꽃봉오리는 따뜻한 솜이불로 감싸고 무더운 여름을 견뎌 냈다. 그 사이에 나무는 꽃봉오리를 오동통하게 키웠다.
지난 계절 동안 여투어 둔 양식으로 애면글면 살아야 하지만, 생명 활동을 중지할 수 없다. 바람 맵고 눈보라 몰아쳐도 그렇다. 다가올 봄까지 애써 키운 꽃봉오리를 튼실하게 보존해야 한다. 이른 봄에 서둘러 하얀 꽃을 피우려면 이 겨울을 잘 버텨 내야 한다. 더 강인해져야 한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바로 전, 지금이 나무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다. 잎이든 꽃이든 생명을 피워 내려면 오랜 시간 동안 슬기롭게 채비해야 한다. 단숨에 태어나는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나무는 누구보다 치열해야 한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나무는 사람의 향기와 무늬를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나무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무 곁에 남긴 사람살이의 향기와 무늬를 제 몸에 새겨야 한다. 대지에 따스한 바람 스미는 봄 되어 다시 사람들이 나무 그늘에 들어설 때, 그들이 남겼던 향기와 무늬를 사람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지금 나무는 사람이 남긴 모든 삶과 말을 기억하고 제 몸 안에 차곡차곡 담아 두어야 한다.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겨울 침묵 속에서 나무는 말없이 제 삶을 이뤄 낸다. 안쓰러울 만큼 치열한 말 없는 나무의 삶이다. 생명의 지혜, 사람살이의 슬기가 결코 몇 마디 말에 들어 있지 않음을 들판에 홀로 선 겨울나무는 웅변으로 들려준다. 나무는 말하지 않으면서 누구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생명체다. 무엇보다 눈보라 매운 바람에 맞서는 생명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겪어 내는 생명체다. 자연스레 그의 융융한 몸 안에 사람이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찬란한 생명의 언어가 웅숭깊이 쌓인다.
나무 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살이이건만 사람의 마을엔 껍데기뿐인 말들이 미치광이 춤을 춘다. 말없이 살아가는 나무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잔혹한 언어들은 표현을 달리하며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다. 생명의 치열함이나 진정성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몰아넣는 의과대 교수의 말이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일이 안 되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정치인의 극언도 있다. 파렴치한 언어유희로 수백 수천의 청중을 희롱하는 대중 인문학 강사들의 말들도 끊이지 않는다. 언어유희에 생명은 없다. 평화와 정의가 담길 자리는 없다. 삶의 현장에 나서 본 적도 다가설 생각도 없이 오로지 머리와 입으로만 이어가는 언어유희에 어질병이 생길 정도다.
사람의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는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가 된다. 정의와 평화의 샘이 바로 그곳에 있다. 지금은 극단을 치닫는 언어유희를 내려놓고 생명의 알갱이를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잃었던 정의와 평화는 결단코 언어유희로 찾아지지 않는다.
이 겨울,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무의 생명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북극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겨울 아침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그 파란 잎을 피우기 위해 나무는 찬 바람 속에서도 차근차근 채비해야 한다. 지나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공연히 서둘렀다가는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없지만, 나무는 이 땅의 여느 생명보다 겨울을 치열하게 보내는 중이다.
잎 나기 전에 꽃부터 먼저 피우는 나무도 적지 않다. 목련이 그렇고 산수유가 그렇다. 일찌감치 봄을 알리는 꽃들이 대개 그렇다. 목련은 지난봄에 꽃 떨구면서 곧바로 꽃봉오리를 맺었다. 처음부터 겨울 추위에 대비해 꽃봉오리는 따뜻한 솜이불로 감싸고 무더운 여름을 견뎌 냈다. 그 사이에 나무는 꽃봉오리를 오동통하게 키웠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나무는 사람의 향기와 무늬를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나무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무 곁에 남긴 사람살이의 향기와 무늬를 제 몸에 새겨야 한다. 대지에 따스한 바람 스미는 봄 되어 다시 사람들이 나무 그늘에 들어설 때, 그들이 남겼던 향기와 무늬를 사람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지금 나무는 사람이 남긴 모든 삶과 말을 기억하고 제 몸 안에 차곡차곡 담아 두어야 한다.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겨울 침묵 속에서 나무는 말없이 제 삶을 이뤄 낸다. 안쓰러울 만큼 치열한 말 없는 나무의 삶이다. 생명의 지혜, 사람살이의 슬기가 결코 몇 마디 말에 들어 있지 않음을 들판에 홀로 선 겨울나무는 웅변으로 들려준다. 나무는 말하지 않으면서 누구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생명체다. 무엇보다 눈보라 매운 바람에 맞서는 생명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겪어 내는 생명체다. 자연스레 그의 융융한 몸 안에 사람이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찬란한 생명의 언어가 웅숭깊이 쌓인다.
나무 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살이이건만 사람의 마을엔 껍데기뿐인 말들이 미치광이 춤을 춘다. 말없이 살아가는 나무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잔혹한 언어들은 표현을 달리하며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다. 생명의 치열함이나 진정성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몰아넣는 의과대 교수의 말이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일이 안 되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정치인의 극언도 있다. 파렴치한 언어유희로 수백 수천의 청중을 희롱하는 대중 인문학 강사들의 말들도 끊이지 않는다. 언어유희에 생명은 없다. 평화와 정의가 담길 자리는 없다. 삶의 현장에 나서 본 적도 다가설 생각도 없이 오로지 머리와 입으로만 이어가는 언어유희에 어질병이 생길 정도다.
사람의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는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가 된다. 정의와 평화의 샘이 바로 그곳에 있다. 지금은 극단을 치닫는 언어유희를 내려놓고 생명의 알갱이를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잃었던 정의와 평화는 결단코 언어유희로 찾아지지 않는다.
이 겨울,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무의 생명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북극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겨울 아침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