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매일 같이 야구를 보는 인간은 겨울은 자기 계발의 기회가 된다. 하루에 꼬박 네 시간, 거기에 이기는 날은 꼭 본다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시청 시간까지 합하면 다섯 시간 정도를 야구에 팔려 있었으니, 그 시간 다른 할 일이 오죽이나 많겠는가? 아이들을 돌볼 때에도, 야구를 틀어 놓고 스코어를 살피면서 정신이 산만할 때보다 지금이,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심야 하이라이트 대신에 책을 읽으면 양식과 상식이 모두 두터워질 것이다. 명승부에 기운이 빠지는 대신 가족과 대화 시간을 갖고 요즘 고민거리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졌다고 마음 상해 하는 일 없이 동네 헬스장에 가서 내 몸의 건강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구란 것이 또한 요물인지라 겨울의 휴식기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게 문제다. 팀에 어떤 선수가 새로 올지, 떠나는 선수는 누구인지 뉴스를 기다린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에 일희일비한다. 내가 쓰는 돈도 아니면서 구단의 돈 씀씀이에 이래저래 말참견이다. 내가 버는 돈도 아닌데 누구누구는 연봉 많이 올려 줘야 한다면서 오지랖이다. 차라리 야구를 하면 하루는 이겨서 좋고, 하루는 지니까 신경을 꺼 버리는데, 야구를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겨울을 보내는 것이다. 이 모든 혼란이 정리되고 어서 4월이 오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겨울철 야구 뉴스의 노른자는 아무래도 대형 계약 건일 수밖에 없다. 80억, 98억, 115억…. 고급 요구르트에 함유된 유산균의 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2017년 시즌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스토브리그에서의 대형 에프에이(FA)의 몸값이다. 타이거즈는 작년 이맘때 FA 최형우를 100억 원에 영입했다. 뒤이은 이대호의 국내 복귀(4년 총액 150억 원)로 인해 최고액 기록은 금세 깨졌지만, 최형우는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로 100억 원을 돌파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그만큼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타이거즈의 통합 우승에 크게 기여한다. 대형 계약이 늘 팀의 성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2003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28억 원을 들여 라이온스에서 영입한 거포…. 서로 괴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는 편이 낫겠다.

올해 스토브리그(시즌이 끝난 겨울, 선수의 재계약이나 이적 소식 등으로 달아오르는 시기를 말한다)는 실제 리그가 한참이던 때보다 더욱 요란해진 뉴스들을 양산하고 있다. 몇몇 외야수들은 ‘오버 페이’ 논란을 일으키며 팀을 옮기거나 잔류를 택했고, 몇몇 베테랑 내야수는 대형 계약은커녕 선수 생활의 존속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한때 타이거즈에서 뛰기도 했던 1루수 정성훈은 예상치 못한 방출 후에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고, 평균 이상의 홈런과 타점 능력을 갖춘 거포들도 주력과 수비력 및 부상 이력 등 결국 ‘나이’라는 덫에 걸려 계약에 애를 먹고 있다. 경기장에서의 야구는 엔터테인먼트나 드라마가 되기도 하지만 경기장 밖, 협상 테이블에서의 야구는 냉혹한 비즈니스가 되곤 한다.

어떤 소식은 꼭 충격적 인사이동을 알리는 사내 메일이나 문자처럼 느껴진다. 지난달에는 목례 정도만 주고받던 동료의 퇴사가 있었다. 직장의 문화라는 게 점점 바뀌고 있고 최근에는 그 양상이 가파른 바,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다음 차를 물색하는 퇴사 기념 회식은 어느덧 많이 사라졌다. 그저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그간 수고 많으셨다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잠깐 쉬거나 다른 팀 아니, 회사로 이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이다. 거액의 계약금 대신 실업수당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고, 어디서든 야구 선수만큼의 연봉을 받기는 대체로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면 야구 선수와 조금 더 친밀성을 느끼는 이유는 한때 스타였던 그들도 결국 직장인이라는 현실을 깨닫기 때문일지도.

어쨌거나 우리는 겨울철 난로(스토브)를 켜고 주위에 둘러앉아 내년 봄을 이야기한다. 시즌 때 받게 되는 승패의 압박감이 없으니 도리어 야구를 즐기기에 겨울은 딱 알맞은 계절인 것처럼 느껴진다. 야구 없는 겨울이니 가능할 것 같았던 자기 계발로의 의지는 겨울 강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듯하다. 야구 경기가 없어 확보된 네 시간은 주먹 안에 모래처럼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양현종과 김주찬의 재계약 결과가 뜰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야구 커뮤니티에 접속해 매번 팬끼리 설전을 벌이기 마련인 ‘가상 트레이드 게시물’과 댓글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무엇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다음 시즌에는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은, 즐거운 상상이 얼마든 가능한 계절이 바로 겨울인 것이다.

야구는 이렇게 365일의 일상에 스며든 강력한 콘텐츠가 되었다. 수십 억 원을 호가하는 계약 소식에서부터 하루아침에 팀을 떠나게 된 선수의 안타까운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 심지어 바다 건너 미국과 일본의 팀 정비 소식까지, 스토브리그는 야구 없는 시간의 외로움과 추위를 피해 스토브를 쬐는 시간이다. 이러다 갖가지 과한 정보로 불길이 세진 난로에 옷깃이 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평생 만질 수 없는 돈을 기사로 보며 문득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계약금이니 연봉이니 하는 것보다는 야구에서는 역시 안타니 홈런이니 하는 말들이 어울린다. 난로는 난로다. 멀리서 손이나 녹이는 게 제격일 테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