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베더라도 머리털은 못 자른다
2017년 09월 18일(월) 00:00 가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 가던 무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글자나 알던 지식인이나 선비들이라면 바르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생업이라고는 1차산업인 농업에 의존한 가운데 3강5륜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예의범절에 부족함이 없이, 씨족끼리 집성촌을 이루며 유교적 세계관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세월이었다.
어느 날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이웃나라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고 호시탐탐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큰 갓과 넓은 띠’(峨冠博帶)에 승수 높은 도포를 입고 선비로서의 당당한 품위를 유지하던 선비라면 바른 정신 지키기가 어려웠다.
수천 년 전통문화의 가치와 정신을 어떻게 버리겠느냐면서 서구와 일본은 짐승의 무리와 같은 ‘사’(邪)라고 지칭하던 위정척사(衛正斥邪)파와 전통을 버리고 서구와 일본의 논리를 따르자던 개화파가 대립관계를 이루던 때가 또 그 시절이었다.
위정척사파의 양대 계열은 경기도의 화서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선비들과 호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奇正鎭) 문하 선비들로 이뤄졌다. 화서의 제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두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그들의 위정척사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했던 선비가 무안 출신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1864∼1944)이었다.
민재는 32세에 괴나리봇짐을 지고 무안에서 도보로 경기도 포천까지 찾아가 면암 선생의 제자가 되었으며, 장성의 송사 선생을 자주 찾아다니며 학문을 물었던 학자인데, 면암과 송사가 한말 구국 투쟁으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키자 두 분 의병대장의 예하 의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면암은 민재라는 호를 내려주고 송사는 민재기(敏齋記)를 지어서 민재라는 호를 내려 준 면암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런 연유로 민재는 평생 동안 두 분 스승의 학문과 뜻을 따르느라 호남의 마지막 위정척사파의 큰 선비로 자리하였다.
면암은 의병을 일으켜 패한 뒤 일본 대마도에 구류되어 단식으로 순국하였고, 송사도 의병은 패하고 망국을 맞자 의분에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두 스승을 잃은 민재는 47세에 망국을 맞아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분과 분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갑오경장으로 나라의 옛날 전통이 무너지고 이른바 ‘개화파’의 새로운 논리가 지배하면서 전통 학문만 익힌 선비들은 그들과 맞설 힘은 없고, 그대로 견디자니 너무 가슴이 타들어 삶의 의욕을 잃을 때였다. 한창 단발령이 내려, 울면서 머리털을 자르던 시절 민재는 결코 머리털까지 자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머리털을 두고 죽을지언정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寧有存髮而死 不可亡髮)라는 굳은 소신을 피력하면서 끝까지 보발한 모습으로 81세의 수를 누렸으며, 1944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삶을 마감하였다. 민족적 의기와 위정척사 정신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삶의 일생이었다.
집안에서 전해지기를 ‘적퇴불원’(敵退不遠)을 항상 말하면서 면암·송사 두 스승의 위패를 벽장 안에 모시고 삭망에는 향불을 피워 올리면서 지금이야 왜놈들의 방해로 두 분 스승의 사당을 세울 수 없으니 조국이 해방되면 바로 사당을 세우라는 유언을 자제들에 남겼다고 한다. ‘적퇴불원’, 그렇다. 왜적이 물러날 때가 멀지 않다. 조금만 기다리면 광복이 오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계산재(溪山齋)와 평천정사(平川精舍)라는 두 서당을 개설하여 무안·함평·영광·신안 등지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면서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는 데 조금도 소홀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기 직전 민재의 유문을 편집하여 ‘민재유고’(敏齋遺稿) 8권 4책을 간행하였고,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마침내 민재의 유명(遺命)에 따라 ‘평산사’(平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면암·송사 두 스승의 위패를 모셨고 몇 년 뒤 두 스승 후손들의 동의와 도내 유림들의 공론에 의하여 평산사의 두 스승 곁에 민재의 위패를 모셔 혈식(血食)의 군자로 모두의 추앙을 받는 지위에 올랐다.
민재 선생은 필자의 증조부이다. 우리 조부와 아버지도 왜놈의 학교는 구경도 못했고, 조부는 보발로 일생을 보냈다. 유학만 공부한 조부·부친은 문집을 남겨 증조·조부·부친 3대의 문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집안이다. 위정척사의 정신은 조국 광복에도 한 축을 이룬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런 분들의 의혼도 이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수천 년 전통문화의 가치와 정신을 어떻게 버리겠느냐면서 서구와 일본은 짐승의 무리와 같은 ‘사’(邪)라고 지칭하던 위정척사(衛正斥邪)파와 전통을 버리고 서구와 일본의 논리를 따르자던 개화파가 대립관계를 이루던 때가 또 그 시절이었다.
위정척사파의 양대 계열은 경기도의 화서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선비들과 호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奇正鎭) 문하 선비들로 이뤄졌다. 화서의 제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두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그들의 위정척사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했던 선비가 무안 출신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1864∼1944)이었다.
갑오경장으로 나라의 옛날 전통이 무너지고 이른바 ‘개화파’의 새로운 논리가 지배하면서 전통 학문만 익힌 선비들은 그들과 맞설 힘은 없고, 그대로 견디자니 너무 가슴이 타들어 삶의 의욕을 잃을 때였다. 한창 단발령이 내려, 울면서 머리털을 자르던 시절 민재는 결코 머리털까지 자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머리털을 두고 죽을지언정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寧有存髮而死 不可亡髮)라는 굳은 소신을 피력하면서 끝까지 보발한 모습으로 81세의 수를 누렸으며, 1944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삶을 마감하였다. 민족적 의기와 위정척사 정신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삶의 일생이었다.
집안에서 전해지기를 ‘적퇴불원’(敵退不遠)을 항상 말하면서 면암·송사 두 스승의 위패를 벽장 안에 모시고 삭망에는 향불을 피워 올리면서 지금이야 왜놈들의 방해로 두 분 스승의 사당을 세울 수 없으니 조국이 해방되면 바로 사당을 세우라는 유언을 자제들에 남겼다고 한다. ‘적퇴불원’, 그렇다. 왜적이 물러날 때가 멀지 않다. 조금만 기다리면 광복이 오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계산재(溪山齋)와 평천정사(平川精舍)라는 두 서당을 개설하여 무안·함평·영광·신안 등지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면서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는 데 조금도 소홀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기 직전 민재의 유문을 편집하여 ‘민재유고’(敏齋遺稿) 8권 4책을 간행하였고,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마침내 민재의 유명(遺命)에 따라 ‘평산사’(平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면암·송사 두 스승의 위패를 모셨고 몇 년 뒤 두 스승 후손들의 동의와 도내 유림들의 공론에 의하여 평산사의 두 스승 곁에 민재의 위패를 모셔 혈식(血食)의 군자로 모두의 추앙을 받는 지위에 올랐다.
민재 선생은 필자의 증조부이다. 우리 조부와 아버지도 왜놈의 학교는 구경도 못했고, 조부는 보발로 일생을 보냈다. 유학만 공부한 조부·부친은 문집을 남겨 증조·조부·부친 3대의 문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집안이다. 위정척사의 정신은 조국 광복에도 한 축을 이룬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런 분들의 의혼도 이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