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이란 스스로 마땅히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말한 계몽의 정의다. 이에 따르면 계몽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서 성숙한 단계로 나가는 것이다.

미성숙을 극복하는 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이성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이 있는 사람이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주체의 각성을 강조하는 것은 계몽을 통해서 성숙한 사회, 인간적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자아가 확립되면 과연 ‘더 인간적인 상태’를 실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재 모습을 둘러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 과거보다 더 계몽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계몽의 결과는 더 많은 정보, 지식과 기술을 통해서 삶의 편리함이라는 과실로 나타나고 있다.

모두에게 개방되는 기회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이 되도록 한다. 주체적인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길 만큼 주체성은 현대 사회의 미덕이다. 하지만 주체적인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과연 인간적 가치가 더 실현될 것인가?

이성의 힘으로 원시의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된 개인’은 분명 전보다 더 똑똑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해졌는가? 주체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계몽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독일 나치의 파시즘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라는 두 철학자에게서 들을 수 있다.

이 두 철학자는 칸트식의 계몽적 이성주의는 인간을 성숙한 단계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폭력적인 ‘야만’에 빠지게 했다고 말한다. 두 철학자에 따르면 주체적 이성만을 강조하는 계몽은 이미 자기 안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퇴보의 싹’을 품고 있다. 바로 이성의 독단이다.

내재된 퇴보의 싹은 계몽의 목적을 변질시키고 내부에 숨겨진 계몽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계몽적 이성은 자신이 아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으로 나누고,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미성숙의 상태를 교정하려고 한다. 즉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에 빠진 계몽적 이성은 자기와 다른 것을 끊임없이 계몽하려고 하면서 자신과 같아질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것은 곧 ‘잘못된 것’ 내지는 ‘악한 것’이고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계몽의 결과는 처음 계획했던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지배 방식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두 철학자가 비판하는 계몽의 파괴성과 이성의 독단을 우리는 일상적 현실 속에서 자주 경험한다. 분명히 계몽은 개인이 전통적 가치로부터 해방되어서 스스로 세계의 중심에 서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주인이 된 개인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면서 진보의 의미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지식을 통해서 지배하는 힘을 얻은 개인은 이해타산에 뛰어나며, 정신세계와 진지함에 대한 비웃음과 성공을 위한 계산에 능수능란하다.

이렇게 계몽된 개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숭배 대상을 찾아내고 양(量)을 위해서 질(質)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오십 보 백 보’이므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에 이른다. 그리고는 세상에는 더 나은 것도, 큰 차이도 없다는 이유에서 크고 작은 중요한 차이를 말살하고 그 위에 왜곡된 평등의 의미를 덮어씌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의 독단은 종국에는 자신마저도 파괴한다.

이성의 독단이 꼭 사회적인 문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과잉의 자아의식만 있을 뿐 자기반성이 없이 지나치게 ‘계몽된 개인’들이 곳곳에 적지 않다. 아주 작은 일에도 자신이 주체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며 참거나 양보하는 것은 무능함으로 생각한다. 매사에 ‘계몽’이 잘 된 탓에 분석하고 따져 보며, 합리화하면서 이성을 도구화한다.

이들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전체적인 상황의 개선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계몽’이 좀 덜 되었더라도,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개인과 개인이 설령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관계 속에 산다는 것은 늘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싫든 좋든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고민에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화보다 더 좋은 방법이 아직 없지 않은가! 소통이야말로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그래서 소통은 계몽된 이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성의 힘을 소통이 아니고 지배를 위해서 사용할 때 이성은 ‘인간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임무를 배반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타자는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까지 파괴하는 야만과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성적 소통의 최종 목적지는 상호 이해를 넘어서 설득과 승복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제는 크고 작은 모든 관계에서 오직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적 이성에서 과감하게 ‘계몽’되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