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호남 지역은 옛날 이래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의 연수(淵藪)였다” 200년 전 강진에 귀양 살던 다산 정약용이 했던 말이다. ‘연수’란 연못과 숲이라는 뜻이니 물고기가 모여 있는 연못이자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속으로 충신·의사들이 떼를 지어 살아가던 곳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또 말했다. “호남 사람들은 나라에 큰 난리가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분주히 힘쓴 것은 필연코 팔도에서 으뜸이었으니, 이 또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닌가?” 다산은 200년 전에 호남인들의 애국심과 의병 정신을 제대로 파악했었다. 요즘 대통령이 극찬한 ‘광주정신’을 다산 역시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임진·병자 등 국난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려다 장렬하게 순국한 의병장들을 기억하기는 쉽지만, 조선 초기에 의리와 지조를 지키느라 벼슬길을 차단당했던 호남의 세 호걸들인 ‘3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산·중종 시대의 숱한 사화(士禍)에서 의리를 지키느라 희생당한 ‘호남 3걸’은 바로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 귤정 윤구(尹衢:1495∼1542), 나암 유성춘(柳成春:1495∼1522)등 세 분이었다. 이 세 분은 모두 뛰어난 인물로 동시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옥당을 거쳐 호당(湖當)에 들어간 인재들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뜻을 함께한 뒤 의리를 지키느라 낙척(落拓)되고 귀양살이에 들어가 불우한 삶을 마친 분들이었다.

최산두는 광양 출신으로 기묘사화 때 동복현으로 귀양 와 산림에 묻혀 지냈으나 훌륭한 인품과 높은 학식으로 세상에 알려져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업적이 큰 분이었다. 특히 호남의 대학자들인 김인후·유희춘 등이 문하에서 배출된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학문과 의리에 뛰어난 학자를 요즘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윤구는 해남 윤씨로 해남 출신이니 바로 고산 윤선도의 증조부였다. 고산은 그래도 많이 알려졌지만 윤구는 의리의 학자로 아는 사람이 적다. 홍문과 수찬에 오르고 호당에 들어가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으나 기묘사화로 낙척되어 고향 생활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윤구의 아들 손자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큰 벼슬에 올라 떵떵거리는 해남 윤씨였으나 정작 본인은 숨어 살았던 이유로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말았다.

나옹 유성춘은 우리가 잘 아는 미암 유희춘의 친형이다. 아버지 유계린(柳桂隣)은 금남 최부의 사위였으니 유성춘과 유희춘은 바로 금남의 외손자였다. 2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기묘명현으로 추앙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명성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호당을 거쳐 장래가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의리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고 희생으로 끝났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듯 16세기 초 호남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3걸’을 찬양하는데 오늘에는 아무도 호남 3걸의 인물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어쩌란 말인가.

지난 5·18 37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광화문의 촛불은 ‘광주정신’에서 발원했다고 하면서 ‘광주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광주정신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5·18 주인공들이 새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수백 년 전에 호남인들은 다른 어떤 지역 출신들에 앞서 탁월한 의리와 애국의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을사사화 때 의리를 지키다가 함경도로 귀양 가 끝내는 사약을 받고 절사한 금남 최부에서 유성춘·유희춘·윤구의 학맥이 이어져 왔다.

호남정신이자 광주정신은 바로 그런 연면한 역사성을 지니고 발전해 왔다. “호남이 아니면 나라가 없다”라던 임란 때의 호남정신, 죽창과 낫을 들고 일어섰던 동학혁명의 피어린 투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혼과 애국의 깃발, 4·19, 5·18의 숭고한 저항정신은 모두 그런 선열들의 의혼을 이어 오면서 자라난 투혼의 결정체였다.

모처럼 ‘호남정신’이 대접을 받으려는 조짐이 있는 오늘, ‘한국학호남진흥원’이 하루속히 설립되어 전통 학문과 전통적인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여, 그동안 묻힌 의리정신과 의혼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고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