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대의 직장인 모임에서 고향의 풍경을 그려 보자고 한 적이 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모두들 서투른 솜씨로 몇 가지 대상을 선명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은 멀리 내다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그렸다. 그 다음으로 고향 마을의 살림집이나 골목보다 먼저 그리는 대상이 있었으니 마을 어귀나 마을 한가운데의 빈 터에 우뚝 서 있는 큰 나무였다.

예상은 했지만, 각자의 고향을 일일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과가 궁금한 터였다. 서른 명 남짓의 직장인 가운데에 스무 명 넘는 사람이 가장 먼저 그린 공통적인 대상이 나무였다.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 아니어서 나무의 종류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굵고 곧게 뻗어 오른 줄기나 둥글게 펼친 나뭇가지 펼침의 생김새로 보아서는 느티나무로 보였다.

오래 전부터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는 종류는 언제나 소나무였다. 산림청이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설문 조사의 결과가 그렇다. 조사 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소나무를 좋아하는 비율은 대략 50퍼센트에 가깝다. 압도적이다.

고향 풍경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기 십상인 느티나무는 겨우 다섯 번째에 등장한다. 그나마 5퍼센트가 채 안 된다. 느티나무보다 더 좋아하는 나무로 꼽은 나무로 은행나무·단풍나무·벚나무가 있지만 비율은 느티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5퍼센트 안팎이다. 소나무에 대한 애정은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네 고향 마을에서 가장 친근하게 지내는 나무는 느티나무다. 어쩌면 느티나무는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구분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내남없이 우리네 삶에 가장 가까이 스며들어 있는 나무다. 굳이 사랑의 대상으로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더불어 살아온 생명체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보호수 가운데 느티나무는 무려 5500 그루가 넘는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은 소나무는 같은 종류에 속하는 반송, 곰솔까지 통틀어 봐야 고작 1000 그루를 넘지 않는다. 느티나무가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짐작할 만한 수치다.

오랫동안 느티나무는 우리 삶의 광장을 이루었다. 우리 겨레의 모든 삶은 느티나무 그늘에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거치지 않고서는 마을에 들어설 수도, 마을 바깥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들녘 한가운데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들일 나간 아녀자는 느티나무 그늘에 아이를 재웠다. 들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다.

언제나 선선한 바람이 드는 느티나무 그늘에는 모기도 개미도 들지 않아 아이를 재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자란 아이가 거쳐야 하는 성인식도 그곳에서였다. 수시로 벌어지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한 곳도 마찬가지였다. 풍년을 빌기 위한 당산제도, 농한기의 짬을 내 여는 마을 잔치도 느티나무 그늘에서 벌어졌다.

나무는 당산나무가 됐고, 정자나무가 됐다. 필경 느티나무는 우리 겨레의 오래된 광장이었다. 고향 풍경에서 느티나무를 그렸던 예의 직장인들도 그랬다. 무슨 나무냐는 질문에 대개는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라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식물이나 나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으로 떠올린 것이다.

삶의 터전이 될 만큼 잘 자란 느티나무 한 그루에서 돋아나는 이파리는 무려 500만 장이나 된다. 500만 장의 잎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며 이 땅의 모든 바람과 근심을 가리지 않고 품어 안았다. 느티나무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안을, 노동에 지친 사람에게는 안식을 나누어 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평안히 품어 안는다. 통합과 평화의 민주광장, 생명의 터전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공간이지 싶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만 치닫던 모두가 함께 들어서서 모든 생명이 더 평화로운 날들을 찾아야 할 때다. 반목과 갈등, 아픔과 상처를 모두 내려놓고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 느티나무 광장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이유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