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황제국과 제후국을 가리는 중요한 기준은 연호(年號)의 사용 여부였다.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시초인데, 무제는 재위 동안 무려 열한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북방의 천자제국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391∼)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그 이전 고조선에서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는 건흥(建興), 연가(延嘉), 영강(永康)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백제도 일본에 하사했던 칠지도(七支刀)를 통해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역시 진흥왕이 개국(開國)·태창(大昌)·홍제(鴻濟), 진평왕이 건복(建福), 선덕왕이 인평(仁平), 진덕왕이 태화(太和)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삼국 모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황제국이란 뜻이다.

삼국의 연호 사용 전통은 길게 이어졌다. 후삼국 궁예는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4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의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은 천통(天統)이란 연호를 사용했는데, 그 후대 왕들은 재위 기간 1개씩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중국의 명·청 때에 정착된 ‘한 임금은 한 연호만 사용한다’는 1세1원(一世一元) 원칙보다 600여 년 이상 빠른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 광종(光宗)은 광덕(光德)·준풍(峻豊)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이후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인종 13년(1135) 묘청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면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한 것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기에 원나라 연호를 사용했지만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옛 고려영토 회복에 나서면서 원나라 연호 지정(至正) 사용을 중지했다. 이때는 명나라 건국(1368) 전이어서 고려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겠지만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은 개국 초 명나라 주원장의 홍무(洪武)를 사용한 것을 비롯해서 명나라 임금들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명나라가 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숭정(崇禎:1628∼1644)이란 연호를 사용하던 의종(毅宗) 주유검(朱由檢)이 1644년 농민봉기군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자 자결하면서 연호가 사라진 것이다. 조선의 숭명(崇明)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청나라 연호 사용을 거부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다. 그러나 1644년에 망한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하자니 편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숭정기원’(崇禎紀元), 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란 연호였다. 효종 4년(1653)은 청 세조 순치(順治) 10년이지만 숭정 26년이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조선은 갑오개혁 때인 고종 33년(1896)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다는 뜻을 나타냈다. 고종은 이듬해 대한제국을 건립하면서 광무(光武:1897∼1907)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순종은 융희(隆熙:1907∼1910)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일왕의 연호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지만 임시정부는 1919년 대한민국을 건립한 후 국호를 연호로 삼아 ‘대한민국 몇 년’ 식의 연호를 사용했다.

1948년 국내에 환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연호에 관한 법률’로 서력기원과 함께 단군기원을 공용 연호로 제정해 1948년을 단기4281년으로 선포했다. 이후 식민사학이 득세하면서 단군기원이 배척당했지만 올해는 단기 4350년이다.

이른바 태극기집회에서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것에 대해 왜 국내 문제에 외국 국기를 흔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들이 많다. 미국 대통령이라도 방한한다면 한미 우호의 상징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 수 있겠지만 그때도 한국은 미국과 대등한 독립국이란 자부심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설혹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명나라의 속국이란 생각에 숭정 연호를 고집한 것처럼 이 나라를 특정 국가의 속국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순국선열과 태극기,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