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지는 꽃이 아름답다
2017년 03월 23일(목) 00:00 가가
바람 차가워도 봄빛 또렷하다. 만개한 매화의 풍치를 찾아 길 위에 오른 탐매객들의 발길이 매화 명소 주변 도로를 가득 채운다. 복수초에 이어, 노루귀·족두리풀·풍년화·영춘화·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지난여름부터 애면글면 부풀어 오르던 목련 꽃봉오리도 드디어 벌어졌다.
봄에 피는 꽃에는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낸 결기가 담긴 까닭에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다른 계절에 피어나는 꽃들에 비해 아쉬움을 더 많이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렘을 메우기에는 꽃들이 우리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피어 있는 시간이 짧아 아쉬운 꽃으로는 목련이 대표적이다.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목련 꽃은 꽃송이가 큰 데다, 순백의 화려함이 매우 돋보인다. 재우쳐 봄 마중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목련은 환희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목련을 떠올릴 때마다 ‘꽃이 너무 일찍 진다’ 혹은 ‘떨어진 꽃잎이 처참하다’ 등의 아쉬움을 덧붙이곤 한다.
목련을 비롯한 봄꽃이 일찍 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까닭을 알아보려면 먼저 꽃이 피는 목적, 꽃의 존재 이유부터 짚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꽃에도 분명한 존재 이유가 있다.
평생을 한자리에 붙박고 사는 식물이 꽃을 피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옮겨 붙이려는 목적이다. 열매와 씨앗을 맺기 위한 첫 단계다. 씨앗을 맺어 종족을 번성시키기 위한 시작이다. 종족 번성은 모든 생물의 생존 이유이자 목적이다. 수정을 위해 피어난 꽃은 꽃가루받이를 마친 뒤에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더 이상 나뭇가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시들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종류에 따라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의 길이는 조금씩 다르다. 그 가운데 봄에 피는 꽃의 개화 기간은 비교적 짧은 편이다. 까닭이 있다. 봄은 숲의 모든 생명체들이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다. 풀과 나무들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 시기에 맞춰 곤충들의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해진다. 꽃샘바람 맞으며 활동에 나선 곤충들에게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꽃샘추위를 이겨 내려면 부지런히 먹이를 모아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숲속에서 함께 살아 온 식물이 이 같은 곤충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식물은 꽃을 피워 벌 나비를 끌어들여 수정을 이루고, 벌 나비는 꽃송이 안의 꿀을 얻는다. 자연히 꽃의 목적인 수정이 쉽고 빠르게 성취된다. 꽃을 피울 때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화려하게 몸치장을 했지만, 목적을 이룬 뒤에는 더 이상 화려해야 할 이유도, 존재할 이유도 없다. 아무 미련 없이 꽃은 생을 마감하고 추락한다.
꽃가루받이의 한순간을 위해 목련은 지난여름에 꽃봉오리를 맺고 수굿이 몸피를 키워 드디어 파란 봄 하늘 아래 화려하게 피었다. 그러나 금세 수정을 이룬 목련 꽃이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미련 없이 다 버려야 한다. 다른 꽃의 수정을 위해 목련은 찰나에 누린 영화를 내려놓는다. 꽃잎의 추락은 꿀을 찾아 나선 벌 나비에게 자신이 수정을 마친 꽃임을 나타내는 표시다. 장엄한 추락이다.
시들어 떨어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신호를 남기는 꽃도 있다. 여름에 피는 수국 꽃이 그렇다. 수국은 벌의 눈에 잘 띄기 위해 꽃송이 주위에 크고 화려한 헛꽃을 피운다. 벌이 수국 꽃의 꽃가루받이를 이뤄 준 뒤에 헛꽃은 신비로운 현상을 보여 준다. 벌의 도움이 필요 없어진 수국의 헛꽃은 다른 나무의 꽃가루받이를 돕기 위해 놀라운 변신을 시도한다. 하늘을 항해 피어났던 헛꽃은 땅을 향해 꽃잎을 백팔십도 뒤집어엎는다. 혹시라도 찾아올 벌에게 ‘나는 이미 혼사를 마쳤으니, 다른 꽃을 도와주세요’라는 신호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식물의 지혜다. 수만, 수억 년 동안 이 땅의 모든 생물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뤄 온 생명의 원리다.
물러나는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는 건 사람 뿐이지 않나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 잇속을 챙기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뒷모습은 추악하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때 미련 없이 떠나는 게 생명의 이치다. 아집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물러가야 할 이유에 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탐욕이 이 땅의 봄을 서글프게 하는 날들이다.
아름다움은 가증스러운 미소와 화려한 머리치장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충실하게 따르는 데에서 나온다. 지는 꽃이 아름다운 까닭이다. 생명의 이치에 승복하고 장엄하게 추락하는 꽃잎 앞에 한없이 고개를 숙인다.
<나무 칼럼니스트>
봄에 피는 꽃에는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낸 결기가 담긴 까닭에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다른 계절에 피어나는 꽃들에 비해 아쉬움을 더 많이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렘을 메우기에는 꽃들이 우리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목련을 비롯한 봄꽃이 일찍 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까닭을 알아보려면 먼저 꽃이 피는 목적, 꽃의 존재 이유부터 짚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꽃에도 분명한 존재 이유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숲속에서 함께 살아 온 식물이 이 같은 곤충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식물은 꽃을 피워 벌 나비를 끌어들여 수정을 이루고, 벌 나비는 꽃송이 안의 꿀을 얻는다. 자연히 꽃의 목적인 수정이 쉽고 빠르게 성취된다. 꽃을 피울 때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화려하게 몸치장을 했지만, 목적을 이룬 뒤에는 더 이상 화려해야 할 이유도, 존재할 이유도 없다. 아무 미련 없이 꽃은 생을 마감하고 추락한다.
꽃가루받이의 한순간을 위해 목련은 지난여름에 꽃봉오리를 맺고 수굿이 몸피를 키워 드디어 파란 봄 하늘 아래 화려하게 피었다. 그러나 금세 수정을 이룬 목련 꽃이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미련 없이 다 버려야 한다. 다른 꽃의 수정을 위해 목련은 찰나에 누린 영화를 내려놓는다. 꽃잎의 추락은 꿀을 찾아 나선 벌 나비에게 자신이 수정을 마친 꽃임을 나타내는 표시다. 장엄한 추락이다.
시들어 떨어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신호를 남기는 꽃도 있다. 여름에 피는 수국 꽃이 그렇다. 수국은 벌의 눈에 잘 띄기 위해 꽃송이 주위에 크고 화려한 헛꽃을 피운다. 벌이 수국 꽃의 꽃가루받이를 이뤄 준 뒤에 헛꽃은 신비로운 현상을 보여 준다. 벌의 도움이 필요 없어진 수국의 헛꽃은 다른 나무의 꽃가루받이를 돕기 위해 놀라운 변신을 시도한다. 하늘을 항해 피어났던 헛꽃은 땅을 향해 꽃잎을 백팔십도 뒤집어엎는다. 혹시라도 찾아올 벌에게 ‘나는 이미 혼사를 마쳤으니, 다른 꽃을 도와주세요’라는 신호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식물의 지혜다. 수만, 수억 년 동안 이 땅의 모든 생물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뤄 온 생명의 원리다.
물러나는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는 건 사람 뿐이지 않나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 잇속을 챙기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뒷모습은 추악하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때 미련 없이 떠나는 게 생명의 이치다. 아집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물러가야 할 이유에 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탐욕이 이 땅의 봄을 서글프게 하는 날들이다.
아름다움은 가증스러운 미소와 화려한 머리치장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충실하게 따르는 데에서 나온다. 지는 꽃이 아름다운 까닭이다. 생명의 이치에 승복하고 장엄하게 추락하는 꽃잎 앞에 한없이 고개를 숙인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