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육룡이 날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는 “임금아 알으소서 낙수(洛水)에 사냥 가 있어 할아빌 믿으리이까(125장)”로 끝난다. 마지막 장을 임금에 대한 경계로 끝마친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하(夏)나라 3대 임금 태강(太康)의 고사이다.

태강은 할아버지 우왕(禹王)의 손자라는 것만 믿고 정사는 소홀히 하고 사냥만 즐겼다. 낙수에 사냥 가서 백 일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유궁씨(有窮氏)의 제후인 예가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요즘말로 하면 국왕을 탄핵시킨 것이다. 태강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주구시(周口市)의 태강현(太康縣)인 양하(陽夏)에 쫓겨나 10년 뒤 병으로 죽고 말았다.

태강의 다섯 동생들은 모친을 모시고 낙수 북쪽에서 우 임금의 훈계를 노래로 지어 불렀는데, 이것이 ‘서경’(書經) 하서(夏書)에 다섯 아들의 노래란 뜻의 ‘오자지가’(五子之歌)로 전해진다. 서장(序章)과 다섯 장의 노래로 구성되었는데, 서장에서 “태강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놀고 게으름만 피우며 덕을 망쳤네/ 백성들이 모두 두 마음을 먹었는데도/ 즐기고 노는데 절도가 없었네”라고 한탄하고 있다. 1장은 “황조(皇祖)께서 유훈이 계셨으니/ 백성들은 가까이할망정/ 얕잡아 보면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세야 나라가 평안하다/ 내가 천하를 둘러보니/ 어리석어 보이는 사내와 아낙도/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였다. …… 어찌 위에 있는 사람이/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이다.

5장은 쫓겨난 태강의 심정을 노래한다. “오호라,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내 마음의 슬픔이여/ 만백성이 나를 원수로 아니/ 내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답답하고 슬프구나 이 내 마음이여/ 얼굴은 붉어지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 그 분의 덕을 삼가지 못했으니/ 후회한들 쫓아갈 수 있겠는가?”

하(夏)나라는 서기 전 2000년 경부터 서기 전 1500여년 전까지 존속했던 나라로 추측하는데,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에 지어진 노래 가사가 마치 지금의 우리나라 정국 상황을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만백성이 대통령을 원수로 아는 상황도 같은데, 그때와 다른 점은 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하게 자란 후예들이 비참한 지경에 처하는 예를 찾기 어렵지 않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속담이 주는 교훈이 사라진 지 오래인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선에서는 신숙주(申叔舟)의 아들 신정(申瀞)이 그랬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사육신과 달리 수양대군의 편에 섰기에 숱한 비난을 받은 대신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신정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초를 몰랐다.

성종이 재위 4년(1473) 형조 담당 좌승지 신정에게 “요즘 죄수 중에 사형수가 많으니 국안(鞫案:수사 및 판결 기록)을 잘 살펴서 살릴 방도를 찾으라”고 명했다. 신정은 “감사와 수령이 이미 추안(推案:판결기록)을 만들었으니 신이 살릴 방도를 찾으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신정은 사형수는 자신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해서 꼼꼼히 살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신정은 성종 13년(1482) 고령현(高靈縣)의 부유한 사노(寺奴)를 빼앗기 위해 어보(御寶)를 위조했다가 발각되었다. 성종이 “죄를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나 끝내 부인하다가 사형당했다. 인조 때의 문신 이덕형(李德泂)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서 “(신정은) 어려서부터 귀하게만 자라 성질이 교만해 얼굴에 분한 기색을 띠고 한결같이 숨겼다”고 평했다.

지금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정·재계의 2∼3세들이나 이른바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미 평등한 사회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이들은 전 근대 사회에 머물러 있다 보니 세상과 맞지 않아 온갖 소동을 일으키고 자신들도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