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봄은 낮은 곳에서 온다
2017년 02월 23일(목) 00:00 가가
숲이 깨어난다. 길었던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속 깊이 내린 뿌리에서부터 생명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서리서리 뻗은 뿌리들이 제가끔 기지개를 켜며 물을 끌어올린다.
시작은 고로쇠나무였다. 땅 깊은 곳에서 시작한 봄의 기운을 고로쇠나무가 알아챈 건 벌써 한 달쯤 전이다. 나무줄기에선 물오르는 소리가 약동하고, 이를 감지한 농부들은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고 호스를 꽂았다. 사람에게 수액을 빼앗기면서도 나무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릴 양분을 지어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새 잎 틔우고 꽃 피우며 열매 맺으려면 온 가지에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봄의 전령 복수초의 노란 꽃이 피어난 것도 이미 한참 지났다. 사람의 눈치로는 도무지 언 땅 어디에서도 봄의 기운을 채 느끼기 전인 스무 날 쯤 전이다. 산중에 쌓인 눈과 얼음을 뚫고 피어난다고 해서 ‘얼음새꽃’이라는 별명도 가진 풀꽃이다. 하지만 복수초가 얼음을 뚫고 피어나는 건 아니다. 눈 내리기 전에 피어난 복수초 꽃송이 위로 쌓인 눈을 복수초 꽃의 열기가 녹인 것이다. 눈 내리고 얼음 얼어도 이미 다가온 봄의 조짐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복수초의 결기다.
매운바람 눈보라 맞으며 피어 있는 복수초 꽃은 작지만 환하다. 꽃잎 안쪽에 무수하게 돋아난 꽃술들은 볼수록 화려하다. 가늣하게 비쳐 드는 햇살을 그러모으려 꽃잎을 둥근 접시처럼 안쪽으로 오므렸다. 꽃송이 한가운데로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작은 생명체가 활용할 수 있는 생존의 슬기를 총동원해 노랗게 피었지만, 복수초는 조심스럽다. 그래서 고개를 높이 쳐들지 못했다. 땅바닥에 납작 쪼그려 앉은 채 피어난다. 거의 바닥에 붙어서 피어나는 복수초의 키는 고작해야 10센티미터 남짓이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풀꽃들은 대개 키가 작다. 낮은 땅에 바짝 붙어서 피어난다. 복수초와 함께 봄을 알리기 위해 나설 노루귀·새끼노루귀·바람꽃 역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피어난다. 족두리풀이라는 풀꽃은 아예 초록 잎을 이불처럼 덮고, 그 아래 땅바닥에서 꽃을 피운다. 땅의 온기에 기대어야 할 뿐 아니라 봄기운으로 위장한 겨울바람이 언제 다시 불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은 항상 낮은 곳에서 찾아온다. 복수초가 알린 봄소식은 봄의 증표라기보다 봄의 기미를 알리는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봄이 다가오는 조짐을 감지한 작은 생명들이 부르는 봄의 전주곡일 뿐이다. 동토의 숲에 봄소식을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언제 다시 닥쳐올지 모를 꽃샘바람이나 잎샘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동장군은 채 물러가지 않았다.
19세기 영국 작가 조지 기싱도 그랬다. “눈옷을 입고 서리 수염을 단 정직한 동장군이라면 무례하지 않게 맞을 수” 있지만 봄의 약속을 마냥 뒤로 미루면서 뒤늦게 찾아오는 겨울의 기세는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봄으로 위장한 겨울 기운은 “봄의 명예를 욕되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용기와 희망을 앗아 간다”고 했다.
볕 바른 곳에 서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꽃 한 송이 피었다고 해서 창졸간에 이 땅에 봄이 다가오는 건 아니다. 철모르고 피어난 개나리·철쭉 꽃 한 송이를 만났다고 해서 봄을 노래할 수는 없다. 호들갑은 이르다. 긴 겨울을 지낸 우리네 성정이 그러하지만 봄은 겨우 낮은 곳에 도착했을 뿐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다. 겨울 추위를 광장에서 혹독하게 지낸 탓에 봄을 기다리는 봄마중이 유난스레 간절하고 왁자하다. 온갖 말들이 소음 되어 허공을 떠돈다. 우리네 겨울이 깊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오려면 이겨 내야 할 고비가 적지 않다. 겨울의 기세에 눌려 속에만 담아 두었던 말들을 무작정 쏟아 낸다고 해서 봄이 오는 건 아니다.
나무의 마을에도 사람의 마을에도 항상 봄은 낮은 곳에서 온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 봄기운을 채 담지 못한 채 홀로 중뿔나게 피어난 꽃들은 결국 조지 기싱의 이야기처럼 봄의 명예를 욕되게 하고, 혹독하게 겨울을 치른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을 앗아갈 수 있다.
아직 바람이 맵다. 서두르지 말고 조심스럽게 낮은 곳에서 보내오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게 바로 이 땅에서 되찾아야 할 봄의 찬란한 명예다.
<나무 칼럼니스트>
시작은 고로쇠나무였다. 땅 깊은 곳에서 시작한 봄의 기운을 고로쇠나무가 알아챈 건 벌써 한 달쯤 전이다. 나무줄기에선 물오르는 소리가 약동하고, 이를 감지한 농부들은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고 호스를 꽂았다. 사람에게 수액을 빼앗기면서도 나무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릴 양분을 지어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새 잎 틔우고 꽃 피우며 열매 맺으려면 온 가지에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작은 생명체가 활용할 수 있는 생존의 슬기를 총동원해 노랗게 피었지만, 복수초는 조심스럽다. 그래서 고개를 높이 쳐들지 못했다. 땅바닥에 납작 쪼그려 앉은 채 피어난다. 거의 바닥에 붙어서 피어나는 복수초의 키는 고작해야 10센티미터 남짓이다.
그래서 봄은 항상 낮은 곳에서 찾아온다. 복수초가 알린 봄소식은 봄의 증표라기보다 봄의 기미를 알리는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봄이 다가오는 조짐을 감지한 작은 생명들이 부르는 봄의 전주곡일 뿐이다. 동토의 숲에 봄소식을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언제 다시 닥쳐올지 모를 꽃샘바람이나 잎샘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동장군은 채 물러가지 않았다.
19세기 영국 작가 조지 기싱도 그랬다. “눈옷을 입고 서리 수염을 단 정직한 동장군이라면 무례하지 않게 맞을 수” 있지만 봄의 약속을 마냥 뒤로 미루면서 뒤늦게 찾아오는 겨울의 기세는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봄으로 위장한 겨울 기운은 “봄의 명예를 욕되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용기와 희망을 앗아 간다”고 했다.
볕 바른 곳에 서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꽃 한 송이 피었다고 해서 창졸간에 이 땅에 봄이 다가오는 건 아니다. 철모르고 피어난 개나리·철쭉 꽃 한 송이를 만났다고 해서 봄을 노래할 수는 없다. 호들갑은 이르다. 긴 겨울을 지낸 우리네 성정이 그러하지만 봄은 겨우 낮은 곳에 도착했을 뿐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다. 겨울 추위를 광장에서 혹독하게 지낸 탓에 봄을 기다리는 봄마중이 유난스레 간절하고 왁자하다. 온갖 말들이 소음 되어 허공을 떠돈다. 우리네 겨울이 깊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오려면 이겨 내야 할 고비가 적지 않다. 겨울의 기세에 눌려 속에만 담아 두었던 말들을 무작정 쏟아 낸다고 해서 봄이 오는 건 아니다.
나무의 마을에도 사람의 마을에도 항상 봄은 낮은 곳에서 온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 봄기운을 채 담지 못한 채 홀로 중뿔나게 피어난 꽃들은 결국 조지 기싱의 이야기처럼 봄의 명예를 욕되게 하고, 혹독하게 겨울을 치른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을 앗아갈 수 있다.
아직 바람이 맵다. 서두르지 말고 조심스럽게 낮은 곳에서 보내오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게 바로 이 땅에서 되찾아야 할 봄의 찬란한 명예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