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칼럼-고규홍의 '나무생각] 겨울 숲
2017년 01월 26일(목) 00:00 가가
겨울 숲은 사색하기 좋은 공간이다. 빛깔도 향기도, 생명의 기미조차 느끼기 어렵다. 간간이 찾아오는 새들의 지저귐을 배경음악 삼아 걸으며 사색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땅 위의 침묵과 달리 땅 밑에는 필경 봄을 채비하는 꿈틀거림이 있다. 봄 마중을 위해 사람 눈에 보이지 않게 새 약동을 채비해야만 한다. 고요에 묻힌 숲은 그래서 생명의 흐름과 이유를 짚어 보기에 ‘알맞춤한’ 공간이다.
침묵의 숲에서 뜻밖에 꽃을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동백나무의 빨간 꽃을 볼 수 있는 것도 이즈음이다. 겨울에 꽃을 피운다 해서 겨울 ‘동’(冬) 자가 붙은 동백나무는 12월이면 이미 꽃을 피운다. 물론 중부 지방의 동백나무는 이른 봄이나 돼야 꽃을 피우지만, 남부 지방의 동백나무는 한겨울에 꽃을 피운다.
매화도 그렇다. 눈 속에 피어난다는 뜻에서 설중매(雪中梅) 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매화 역시 이른 봄에 더 많이 피어나는 꽃이지만, 옛 사람들에게는 겨울에 피어나는 꽃의 상징이었다.
옛 사람들은 겨울에 피어나는 대표적인 꽃으로 매화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래서 매화와 생물학적 친연 관계가 없으면서도 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이유에서 매화라는 이름을 붙인 나무가 있다. 겨울 추위가 시작될 12월쯤부터 꽃을 피우는 특별한 나무다. 12월을 뜻하는 섣달 ‘납’(臘)자에 매화의 ‘매’(梅)를 합해서 ‘납매’라고 부르는 나무가 그 나무다. 중국이 고향이어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식물원이나 수목원 공원 등에서 조경수로 많이 심어 키우기에 이제는 그리 생경하지 않은 식물이 됐다. 여러 언론에서 겨울에 피는 꽃의 상징으로 앞다퉈 소개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나무를 관찰하고 감상하는 방법이 나무마다 달라야 하겠지만, 납매의 꽃을 감상하는 법은 더욱 남달라야 한다. 납매의 꽃은 눈 이외의 감각 특히 후각을 이용해야 더 잘 느낄 수 있다. 향기가 좋고 강하다는 이야기다. 여느 꽃에 비해 향기가 강한 탓에 눈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꽃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납매 꽃의 생김새는 미적으로 탁월한 편은 아니다. 가지 위에 노란 빛으로 핀 납매의 꽃잎은 밀랍을 바른 듯 매끈하지만, 빛깔이 둔탁하다. 1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꽃송이에 둘러서 돋아난 여러 장의 꽃잎은 땅을 향해 늘어진다. 추위에 한껏 움츠렸거나 혹은 추위를 견디느라 지친 듯한 모습이다. 꽃송이 안쪽에 짙은 자주색이 배어 있지만, 그나마 늘어진 꽃잎에 가려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빛깔이나 생김새에서 매혹적인 요인이 아무래도 떨어지는 꽃이다.
그러나 바닐라 향을 닮은 달콤한 향기만큼은 여느 꽃향기 못지않다. 멀리까지 퍼지는 강한 향기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고 말해도 될 듯하다. 놀랍고 신비롭다. 꽃향기는 납매가 오랜 세월 동안 겨울에 꽃을 피우며 살아온 생존 전략의 결과다.
꽃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꽃가루받이를 이루기 위해서 납매는 곤충을 불러들여야 한다. 벌·나비와 같은 매개 곤충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진 겨울에 나무는 향기를 멀리 퍼뜨려 어디엔가 있을 곤충을 유혹해야 한다. 근처에 찾아올 곤충이 적을수록 더 멀리까지 향기를 퍼뜨려야 한다. 필경 어디엔가 있을 누군가에게 향기가 닿아야 한다. 추위가 더할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까닭이다.
강한 향기만으로 마음을 놓을 건 아니다. 오래 버티고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눈보라를 거뜬히 이겨 낼 만큼 강해져야 한다. 다른 계절의 꽃들이 고작해야 열흘 남짓 피어 있는 것과 달리 납매의 꽃은 이듬해 2월쯤까지 무려 백일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꽃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꽃가루받이의 그 한순간을 수굿이 기다린다. 질박한 겉모습 안에 감춰진 강인함이다. 준엄한 생명의 규칙이다.
납매만 그런 건 아니다. 겨울에 피는 거개의 꽃은 향기가 강하거나 빛깔이 화려하다. 동백꽃이 그렇고, 매화가 그러하다. 엄혹한 상황일수록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하는 나무의 생존법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 이유를 이루기 위해 처한 상황에 알맞게 적응해야 한다. 혹독할수록 화려해야 하고, 엄혹할수록 강인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새해다. 우리의 겨울도 이제 마무리해야 한다. 새 시대를 맞이할 즈음이다. 봄이 오는 길목임은 분명하지만, 불쑥불쑥 불어닥치는 기습적인 강추위의 폭력에 대비해야 한다. 겨울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너무 일찍 찾아온 봄이라면 더 그렇다. 나무처럼 더 강해져야 한다. 아직 겨울, 고요의 겨울 숲을 거닐며 한 그루 나무에서 길어 올린 생각 한 조각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매화도 그렇다. 눈 속에 피어난다는 뜻에서 설중매(雪中梅) 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매화 역시 이른 봄에 더 많이 피어나는 꽃이지만, 옛 사람들에게는 겨울에 피어나는 꽃의 상징이었다.
옛 사람들은 겨울에 피어나는 대표적인 꽃으로 매화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래서 매화와 생물학적 친연 관계가 없으면서도 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이유에서 매화라는 이름을 붙인 나무가 있다. 겨울 추위가 시작될 12월쯤부터 꽃을 피우는 특별한 나무다. 12월을 뜻하는 섣달 ‘납’(臘)자에 매화의 ‘매’(梅)를 합해서 ‘납매’라고 부르는 나무가 그 나무다. 중국이 고향이어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식물원이나 수목원 공원 등에서 조경수로 많이 심어 키우기에 이제는 그리 생경하지 않은 식물이 됐다. 여러 언론에서 겨울에 피는 꽃의 상징으로 앞다퉈 소개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그러나 바닐라 향을 닮은 달콤한 향기만큼은 여느 꽃향기 못지않다. 멀리까지 퍼지는 강한 향기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고 말해도 될 듯하다. 놀랍고 신비롭다. 꽃향기는 납매가 오랜 세월 동안 겨울에 꽃을 피우며 살아온 생존 전략의 결과다.
꽃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꽃가루받이를 이루기 위해서 납매는 곤충을 불러들여야 한다. 벌·나비와 같은 매개 곤충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진 겨울에 나무는 향기를 멀리 퍼뜨려 어디엔가 있을 곤충을 유혹해야 한다. 근처에 찾아올 곤충이 적을수록 더 멀리까지 향기를 퍼뜨려야 한다. 필경 어디엔가 있을 누군가에게 향기가 닿아야 한다. 추위가 더할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까닭이다.
강한 향기만으로 마음을 놓을 건 아니다. 오래 버티고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눈보라를 거뜬히 이겨 낼 만큼 강해져야 한다. 다른 계절의 꽃들이 고작해야 열흘 남짓 피어 있는 것과 달리 납매의 꽃은 이듬해 2월쯤까지 무려 백일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꽃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꽃가루받이의 그 한순간을 수굿이 기다린다. 질박한 겉모습 안에 감춰진 강인함이다. 준엄한 생명의 규칙이다.
납매만 그런 건 아니다. 겨울에 피는 거개의 꽃은 향기가 강하거나 빛깔이 화려하다. 동백꽃이 그렇고, 매화가 그러하다. 엄혹한 상황일수록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하는 나무의 생존법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 이유를 이루기 위해 처한 상황에 알맞게 적응해야 한다. 혹독할수록 화려해야 하고, 엄혹할수록 강인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새해다. 우리의 겨울도 이제 마무리해야 한다. 새 시대를 맞이할 즈음이다. 봄이 오는 길목임은 분명하지만, 불쑥불쑥 불어닥치는 기습적인 강추위의 폭력에 대비해야 한다. 겨울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너무 일찍 찾아온 봄이라면 더 그렇다. 나무처럼 더 강해져야 한다. 아직 겨울, 고요의 겨울 숲을 거닐며 한 그루 나무에서 길어 올린 생각 한 조각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