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태종은 재위 2년(1402) 7월 3일, 풍저창(豊儲倉) 책임자인 풍저창 사(使) 김명윤(金明允)을 순위부 감옥에 가두었다. 풍저창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쌀 등의 곡물 등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태종이 김명윤을 옥에 가둔 이유는 풍저창 소속의 사령(使令:하졸)이 죄가 있다는 이유로 쌀 3석(石)으로 눌러 놓아 거의 죽을 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이 사실을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의 보고를 받고 알았다. 그런데 태종은 김명윤을 옥에 가둔 후 “내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랫사람들이 내가 참소(讒訴: 남의 죄를 고해 바침)를 듣는다고 할까봐 두려워서 보고하는 자가 있기를 기다렸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먼저 말하면 아랫사람들이 임금이 누군가로부터 개인적 참소를 듣고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할까 두려워 보고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만큼 임금의 거둥(임금의 나들이)을 무겁게 생각했다는 뜻이고 공적 질서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동양 유교사회에서 선비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했는데 이른바 ‘군자 삼락(三樂)’이다. 맹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에게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을 굽어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맹자, 진심(盡心)상〉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 구절 앞에는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있다. 왕 노릇은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도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에 들지 않는데 그 아래 관직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임금에게도 유자(儒者)로서 도덕적 충고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3등공신 안평부원군 이서(李舒)의 ‘졸기’(卒記)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하루는 이서가 임금을 만났는데, 어좌(御座)에 황색 비단으로 만든 황릉요(黃綾褥)가 깔려 있었다. 이서는 이를 보고, “신이 요의 빛깔을 보니 전하께서 사용하실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이 충고를 듣고 부끄러워서 사례했다고 전한다.(태종실록 10년 9월 9일)

천하의 왕 노릇 하는 임금에게 사치는 즐거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임금과 벼슬아치는 하늘을 대신해 백성들을 다스리므로 검소해야 한다는 가치관이다. 그래야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된다.

고려의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 북경)에 머물면서 정사는 전지를 내려 처리했다. 그러자 충선왕의 측근 권한공(權漢功)이 연경 자택에서 몇몇 측근들과 함께 관직을 팔아먹어 원성이 자자했다.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토번으로 유배 보내고 충숙왕을 즉위시켰다.

충숙왕은 권한공 등을 체포해 이문소(理問所)에서 국문하라고 명했다. 이에 권한공은 뒷간 구멍으로 도망치다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권한공은 곤장을 맞은 후 먼 섬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이제현의 부친인 임해군(臨海君) 이진이 성문 밖에서 전송했다. 이에 권한공은 “천하가 비록 넓지만 내 한 몸 감출 곳이 없네”라고 하소연했다. 이진이 “뒷간 구멍이 좋지 않은가”라고 쏘아붙이자 권한공이 크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고려사, 권한공 열전)

충선왕의 곁에서 온갖 권세를 누리던 권한공이나 현재의 국정 농단 주범들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나라 권력을 한 손에 쥔 듯 온갖 위세를 떨치던 자들이 국회나 헌재의 출두 명령에는 약속이나 한 듯 행방불명인 것은 권한공이 뒷간 구멍으로 도망친 것과 같다. 그나마 이들은 ‘뒷간 구멍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부끄러움을 모를 것 같다.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