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정국이 말해 주는 것은 한국식 대의 민주주의의 파산이다. 그간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정치는커녕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분노가 거리로 나서게 한 것이다. 한국식 대의 민주주의의 파산은 한국식 정당정치의 파산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시대적 요구와 역주행하면서 달렸던 한국 현대사의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1945년 8·15 해방 후 한국의 정치는 어떠해야 했을까?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처단한 토대 위에서 좌파 레지스탕스들이 사회당을 건설하고 우파 레지스탕스들이 보수당을 건설해서 새로운 프랑스 건설에 나섰던 것 같은 정치가 한국에도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과 동시에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 매국세력이 미 군정의 비호로 다시 정권을 잡아 좌파는 물론 우파 독립운동가들까지 청산했다. 그래서 1948년 5월 10일의 제헌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이런 역주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다.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총 200석 중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회는 55석(166만여 표, 24.43%) 획득에 그쳤다. 미 군정 내내 여당이었던 친일 지주들의 정당인 한민당은 29석(82만여 표, 12.1%)에 불과해 두 당을 합쳐도 36.53%였다. 승자는 85명(274만5000여 표, 40.3%)을 당선시킨 무소속이었다. 한독당이 참여했다면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민당은 무소속을 포섭해서 80여 석으로 늘린 후 이승만을 대통령, 김성수를 총리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구상했으나 이승만은 허수아비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관철시킨 후 약속을 깨고 김성수 대신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고 한민당이 부결시키자 다시 이범석을 지명했다. 한민당이 야당의 길을 걸은 것은 이승만에 의해 거듭 팽(烹)당했기 때문이지 자의는 아니었다.

이후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총선거까지 이승만 정권은 국회 프락치사건, 반민특위 해산, 백범 김구 암살 등 실정과 만행을 거듭했고, 그 결과는 제2대 총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승만이 이끄는 집권 여당인 독립촉성중앙회는 210석 중 14석(6.8%)으로 몰락했다. 민중들은 보수 야당에도 준엄한 매를 들었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은 24석(9.8%)에 불과했고, 윤치영의 대한국민당도 24석(9.7%)에 그쳤다.

승자는 126석(62.9%)으로 늘어난 무소속이었다. 6.8%를 득표한 이승만 정권은 지금의 박근혜 정권처럼 완전히 파산 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살린 것은 총선 한 달 후 김일성이 자행한 6·25 남침이었다. 남한 내 극우파와 북한 내 극좌파가 겉으로는 원수처럼 싸우면서도, 2002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게 ‘주체 91년’이라고 표기한 편지를 보낸 것처럼 속으로는 긴밀하게 협력하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을 비롯한 온갖 선거부정과 반공을 빙자한 공포 통치로 10년 이상을 더 집권하다가 1960년의 4·19혁명으로 쫓겨났다. 이때까지 선거는 요식행위였다.

지금은 다른가? 분노한 촛불 민심은 직접 민주주의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세 가지로 압축해 본다. 첫째 일제 강점기가 좋았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의 식민사관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둘째 정치·학문·예술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는 북유럽식 인권 국가로 가야 한다. 지난 9년 동안 한국은 북한과 비슷한 사회로 전락했다.

셋째 공정한 분배의 틀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한다. 경제성장의 열매를 상위 몇%가 독점하는 현 체제는 근본적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이는 대통령을 바꾸는 저차원의 변화로 이룩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다. 선거 날 하루만 유권자가 주인인 파산 난 대의 민주주의를 유권자가 늘 주인인 직접민주주의 체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촛불 민심이 배신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