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술해년에 들은 것이 있어 우연히 시 한 수를 짓다’(戌亥之際有聞偶成一首)라는 시에 ‘호보리에 벼슬아치 얼마나 많은가? 문장은 야랑왕과 같네’(冠蓋幾多狐父里 文章若個夜郞王)라는 구절이 있다. 호보(狐父)는 도적이고 호보리(狐父里)는 도둑들이 사는 도둑촌을 말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개립’(介立)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선비가 굶어죽기 직전에 호보리의 도적이 주는 밥을 먹고 정신을 차렸다가 도적의 음식임을 알고 토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야랑왕은 한(漢)나라 때 중국 남부의 작은 야랑국(夜郞國) 왕인데, 자신을 한나라 임금과 비기면서 뻐겼다는 인물이다. 능력도 없는 자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말과 문장으로 세상을 호도하는 것을 비유한다.

임금의 개인 재산을 내탕금(內帑金) 또는 내탕고(內帑庫)라고 했다. 이 내탕금은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내놓는 재산이었다.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졌던 철종은 재위 13년(1862) “백성들의 형편이 애통하고 나라의 회계가 거덜 난 것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면서 내탕전(內帑錢) 5만 냥을 내려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조는 재위 17년(1793) 삼남 지방에 기근이 들자 내탕금 4000민(緡)과 호초(胡椒) 500근을 삼남 감사에게 나누어 주어 진휼에 보태게 했다. 정조는 내탕금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재위 18년(1794) 임금의 특명으로 치른 과거인 응제(應製)에 합격한 유생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내탕고의 쌀 30포와 100민(緡)을 성균관에 내려서 장학금으로 사용하게 했다.

한번 당파가 바뀔 때마다 많은 신하들을 죽였던 숙종도 여러 차례 내탕금을 내려서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폈다. 숙종은 재위 39년(1713) 경기와 충청도에 흉년이 들자 은 1천 냥을 충청도에 내리고, 8백 냥을 경기도에 내리면서 “내가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을 어린아이를 보살피고 있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말했다.

임금이라고 자기 개인 재산이 아깝지 않을 리는 없지만 백성이 가난한데 임금만 부유할 수 없다는 통치 철학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논어’ ‘안연’(顔淵) 편에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노(魯)나라 애공(哀公)과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세금에 대해서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애공이 유약에게 흉년 때문에 나라의 재용(財用)이 부족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나라는 세금으로 10분의 2를 거뒀는데 유약은 거꾸로 10분의 1을 걷는 철법(徹法)을 쓰라고 권유했다. 애공이 10분의 2를 거두어도 부족한데 어떻게 철법을 쓰겠느냐고 불평하자 유약은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습니까?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시겠습니까?”(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라고 말해 주었다. 백성들이 가난한데 임금 혼자 부유할 수 없고, 백성들이 부유한데 임금 혼자 가난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서 임금의 정치란 천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 이 나라는 거꾸로 대통령과 그 비선 실세 및 측근들만 부유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헬조선’에 신음하고 있다. 이 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으려고 해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거꾸로 많은 국민들의 우려를 무릅쓰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따위나 맺어서 극우로 치닫는 일본이 유사시 이 땅에 진출할 빌미나 제공하고 있다.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정인홍은 “안에 의관(衣冠)을 입은 도둑이 있은 뒤에야 밖으로 간과(干戈)의 침범이 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의관을 입은 도둑’은 부패한 벼슬아치를 뜻하고 ‘간과의 침범’이란 외적의 침략을 뜻한다. 이 나라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가장 큰 주범은 도둑촌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현 정권 핵심부라고 지칭해도 부인할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간 전가의 보도처럼 써 먹던 ‘나라’를 위해서 그만 내려오시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일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