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지킴이 학교로 선정되어 달포 전에 독도를 다녀왔다. 전국에서 온 교원, 학생이 함께한 독도 탐방이었는데 많은 깨우침을 준 일정이었다. 우리 땅 독도라는 한 가지 지향점 때문인지 승선한 모든 분들이 진지해 보였다. 푸른 동해 저 멀리 수 천년 조국의 땅으로 서있는 돌섬. 상당한 속력의 유람선으로도 울릉도에서 1시간 30분가량 물살을 갈라야 다다를 수가 있었기에 목선에 노를 저어 독도를 지킨 분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분들의 영혼인 듯 늦가을 석양을 배경으로 해맑은 해국(海菊)이 바위틈 경사면을 따라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승한 300여 일행들의 또 한 가지 관심사는 과연 독도에 접안할 수 있느냐였는데 다행이 동해의 용왕은 우리의 입도를 허락하였다. 모두 태극기를 흔들고 플래카드를 펼쳐 기념사진을 찍으며 들떠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학교 동료들에게 보냈더니 3대가 덕을 쌓아야 발을 디딜 수가 있다면서 축하해 주었다. 우리보다 하루 전에 갔던 분들은 독도에 접안하지 못하고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하루 다음날 갔던 분들은 배가 도중에 회항하기도 했다. 아쉬워서 낭패스런 표정이 있는가 하면, 좋은 날 택일하여 다시 오겠다는 다짐의 모습도 있었다.

백두산에 갔을 때도 날씨가 좋아 천지와 장백의 광활한 장관을 시리도록 볼 수 있었다. 천지의 맑은 풍경을 본 관광객들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워낙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천지를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 분들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그룹은 누가 날짜를 잡았냐는 등 내내 투덜거리다가 내려가고, 어떤 모임은 안개에 덮인 천지를 상상하면서 안개 덕분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면서 자연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려간다는 것이다. 독도나 백두산 모두 내가 정한 날짜는 아니지만 조상의 공덕까지 들먹이며 축하해 주는 빈말이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산악회에서 산행을 하는데 한 분이 비가 조금씩 내리자 우의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산 정상에서는 비가 그치고 안개가 끼자 경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다. 오후 하산 무렵에는 햇볕이 쨍쨍하자 이번에는 선크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신경질을 냈다. 생각해 보자. 꽉 막힌 마음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여지(餘地)란 말이 있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자투리땅, 남은 공간이다. 어떤 분은 철학적으로 “실천의 강제, 논리의 강제, 이론의 강제 등이 잠시 유보된 빈자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시간과 감정과 이권이 극단으로 부딪치는 이 시대에는 여지가 곧 경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대나 거절을 할 때도 여지가 있게 하면 상대방이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가 쥐에게 물린 경우에도 여지가 없을 때이다.

어떤 현황을 두고 우리는 긍정과 부정 두 가지 판단과 감정을 가지게 된다.

긍정의 힘은 여지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부정의 감정은 여지를 없앤다. 학교에서 많은 공문을 부서별로 분류하다 보면 간혹 어느 부서의 일인지 애매할 때가 있다. 이때 어떤 분은 여지없이 오리 물 털듯이 털어버리는가 하면, 여지가 있는 분은 자기 부서 일이 아닌지 알면서도 일단 그 공문을 받아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찾아와 조곤조곤 설명하면서 차분하게 자기부서의 일이 아님을 말한다. 공문 분류에 대한 자책과 함께 전자의 경우 서운한 마음이 들고, 후자는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똑같이 일을 맡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여지의 여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여지를 너무 많이 보여줘서 탈인 경우도 있다. 정치인이나 주요 지위에 있던 분들이 누릴 것 다 누리고 물러나면서 무슨 ‘마중물’이 되겠다며 여지를 넉넉히 남겨둔다. 그냥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물’이 되는 게 본인이나 단체나 국가에 이로운데 희생양처럼 마중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사실 마중물은 가장 깨끗해야 한다. 퇴물을 마중물로 쓰면 깨끗한 펌프 샘 오염된다. 요즘 나라 모습도 여지없이 정리되어야할 것 같다. 계모임도 이렇게 했으면 진즉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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