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대 또는 현대라는 미명 아래 우리 조상들이 만든 국가 운영시스템을 전 근대적인 것으로 폄하하기 일쑤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가 조상들에게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사실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 체제다.

요즘 ‘비서들의 난’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통령 비서들이 연일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선 실세라는 최순실 씨가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비서진의 대거 교체 사실을 미리 전달받았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국가의 공공성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마저 없다는 실증으로서 국민들에게 배신감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중종 14년(1519) 조광조 등의 사림이 대거 화를 입은 기묘사화는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를 ‘신무문(神武門)의 변(變)’이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을 뜻하는데, 왜 기묘사화를 신무문의 변이라고도 불렀을까? 광화문 등 다른 대궐문의 열쇠는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관장했지만 신무문만은 내시들의 관청인 사약방에서 관리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조광조 등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중종은 홍경주·남곤 등을 몰래 불러 밀지를 내리려고 했지만 승지들이 알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은 임금이 신하들을 만날 때 승지와 사관이 배석해서 모든 대화를 기록했다. 정치는 하늘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모두에게 떳떳해야 하고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온 법칙이었다. 중종은 승지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내시들에게 신무문을 열게 해서 홍경주·남곤 등을 불러 몰래 만나 밀지를 내렸다.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중종은 “신무문이 아니라 연추문(延秋門:서문)으로 들어오게 했으나 승정원에서는 모른다”(‘중종실록’14년 11월 18일)라고 변명했다. 내시들과 몰래 일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이, “만약 상께서 먼저 일으키신 일이라면 즉시 명백하게 보이셔서 인심이 환하게 풀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중종의 면전에서 과정의 공개를 요구했다. 이 날짜 사관(史官)은 “남곤·심정·홍경주 등이…저녁에 신무문으로 들어가 임금을 추자정(楸子亭)에 모셔 의논하고, 도로 나와 연추문으로 들어갔다”고 중종의 변명을 반박하는 기록도 남겼다.

중종이 승지들 몰래 내시들에게 신무문의 문을 열게 시킨 것은 승지들은 기본적으로 선비들이었기 때문이다. 승지들은 자신들이 임금 개인의 사신(私臣)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금이 내린 명령이라도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면 거부했는데, 이를 ‘복역’(覆逆)이라고 했다. 승지들은 때로 ‘복역’이 진정한 충성이라고 여겼는데, ‘복역’은 일탈이 아니라 승정원의 고유 권한이었다. 임금의 명령이 잘못되었는데도 승정원이 복역하지 않으면 오히려 큰 비판을 받았다.

선조 22년(1598) 승지 윤국형(尹國馨)은 “여러 왕자들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청탁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키니 금지시켜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했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臨海君) 등이 임진왜란이란 전란을 겪고도 도리어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자 선조에게 직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며칠 후 특지(特旨)를 내려 윤국형을 지방관인 상주 목사로 좌천시켰다. 그런데 상주로 떠나는 윤국형의 말머리에 승정원 서리 수십 명이 몰려나와 전별 술잔을 올리면서 “승지로서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한탄스럽습니다”라고 위로했다. “사림들이 이 일을 서로 전하면서 아름다운 일로 삼았다”고 ‘문소만록’(聞韶漫錄)은 전한다.

윤국형은 비록 좌천되었지만 선비의 기개를 지킨 승지라는 영예를 얻었고, 사정(私情)을 억제하지 못한 선조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들에게 윤국형 같은 선비의 처신을 요구하는 것은 과할 것이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는 21세기에 조선시대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버젓이 진행되는 현실이 조상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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