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와 가까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왕조국가에서 만기를 친람하는 국왕 곁에 있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되었다. 임금과 가장 가까이 있는 부서가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承政院)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은 승정원에 대해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다”라고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승지(承旨)의 별칭이 임금의 목구멍과 혀를 대신한다는 뜻의 후설지관(喉舌之官)이다. 그런데 승지들은 임금의 명령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었다. 승지들은 자부심이 강한 선비들이었다. 임금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인주(人主)의 종인 내시들이지 선비인 자신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승지들의 이런 생각을 관념화한 것이 헌가체부(獻可替否)였다. 줄여서 헌체(獻替)라고도 하는데,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는 반면 임금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안 된다’(否)고 막는다는 뜻이다. 또한 임금의 명령서인 전지(傳旨)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경우 이를 되돌려 주는 것이 ‘봉환’(封還)이었다. ‘복역’(覆逆)도 임금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봉환’이나 ‘복역’ 등이 모두 승정원의 권한으로 제도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이런 제도들을 승정원에 준 것은 임금의 정사는 하늘을 대신하는 것이고, 이런 국정철학에 따라서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승정원의 역할이라는 것이었다.

임금의 명령이 부당한데도 승정원에서 봉환하거나 복역하지 않을 경우 사헌부·사간원 등 양사(兩司)에서 승정원을 논박했다. ‘염치없고 비루하다’는 논박이었다. 현종 10년(1669) 11월 임금이 유혁연(柳赫然)을 공조판서로 삼았다. ‘현종실록’은 “유혁연은 무장이지만 왕의 총애를 얻었기 때문에 특배로 정경(正卿)에 임명한 것”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사헌부에서 유혁연의 판서 임명이 합당하지 않다면서 체직을 청했다. 현종은 사헌부의 청이 괴이하고 망령되다면서 배척했다. 그러자 사간원 정언 유상운(柳尙運)이 승정원을 비판하고 나섰다. 승정원에서 유혁연의 인사명령서를 복역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논박을 당한 도승지 권대운(權大運)과 우승지 이정(李程), 우부승지 박세견(朴世堅), 동부승지 이지익(李之翼) 등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이 사례가 중요한 것은 거론된 인물들의 당파 구성 때문이기도 하다. 공조판서 유혁연과 도승지 권대운은 같은 당파인 남인들이었다. 반면 승정원을 논박하고 나선 유상운은 반대당파인 서인이었다. 유혁연이 판서로 적당하지 않다고 논박했지만 특별한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승지 이하 승지들이 논박을 받자 즉각 사직을 청했다.

이는 권력기관을 상호 견제시킨 조선의 제도에 대한 승복이자 승지로서 조금의 시비나 구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선비들의 자기 처신의 결과였다. 조선의 선비들이 투옥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사론’(士論)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사론(士論)은 선비들의 중론이란 뜻인데, 지금처럼 ‘무작정 버티기’ 식의 처신을 하면 ‘염치없다’ 또는 ‘비루하다’고 여겨져 사론의 버림을 받았다.

지난 MB(이명박) 정권부터 우리 사회에는 고위공직에 나가려면 ‘병역 기피,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탈세, 논문 표절’ 등 4∼5가지 필수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민초들의 조소가 만연해 있다.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실록’의 사신(史臣)은 윤씨의 형제들인 ‘윤원로·원형’ 형제가 윤씨의 비호로 전횡하는 동안 “조정의 정사가 혼탁하고 어지러웠으며,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졌고,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파리해졌으며,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사관의 말이 조선시대를 말하는 것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