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 ‘퇴임 후의 기록은 발자취로 쓴다’고 한 발언이 ‘발로 쓴다’라는 종편 뉴스의 자막으로 희화화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게 다만 에피소드에 불과한 걸까?

우울한 범죄 뉴스, 사고 뉴스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은 그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이후 ‘일베’의 혐오 행동들이 이어지면서 피해자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각성에 찬물을 끼얹는 현상이 충격적이었다. 구의역에서 발생한 스무 살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은 그 자체로 아픈 것 이상으로, 지하철 ‘메피아’들의 횡포가 드러나고 모두 2인 1조로 일했다고 버젓하게 기록된 행정 서류의 은폐가 끔찍하기만 했다.

남양주 지하철 현장에서 일어난 폭파 사고를 안타까운 인재 사고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사상자 14명이 모두 일용직이었고 현장의 정규직 4명은 지상에서 관리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밖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이 다만 생활고나 부주의에 의한 사고일 뿐일까 하는 불안이 깊어진다. 사회적 병리 현상의 밑바닥에 흐르는 조짐이 심상찮은 것이다.

그 와중에 굵직굵직한 범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비윤리적인 기업인의 돌출 행동인 줄로만 포장되었던 ‘네이처 리퍼블릭 대표 사건’이 검사 출신 변호사들의 로비 사건으로 드러나고, 검사 출신 변호사가 각종 비리 변론을 통해 수백억 원을 벌어 그 돈을 부동산 사업에 운용했던 것은 구역질 나는 사건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현직 검찰과 판사에 대한 로비라는 ‘법조 비리’는 없는 양, 홍만표 한 개인의 탈세 혐의로 좁혀 기소하는 것을 보면서 범죄 영화 이상의 막장이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전 국민이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법조 비리를 덮으려는 건지 아니면 산업은행을 둘러 싼 정권 실세들의 나눠 먹기 놀이를 덮으려는 건지, 갑자기 롯데에 대한 비자금 수사로 모든 언론이 덮이고 있는 것은 심상찮은 조짐이다. 구조조정 운운하면서 그동안 대우조선에 흘러들어간 혈세와, 오직 로비 명목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정권 부나방들을 고문이나 비상임 이사직으로 앉혀 놓고 벌인 돈 잔치를 보면 영화적 상상 이상의 것들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층에서 이런 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비리, 권력 농단, 돈 놀음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 사회의 바탕을 세울 수 있겠는가? 이 와중에도 박근혜정부는 노동 부조리를 악화시키는 법안을 밀어붙이려 들고, 부도덕한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국책은행을 통해 돈을 찍어 내겠다는 행위에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서 ‘안전한 대한민국, 범죄와의 전쟁’이란 말이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세월호, 국정원 사건,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자금 지원 등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심각한 지경이다. 대한민국의 기본이 휘청거린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말 묻고 또 묻고 싶은 심정이다. 범죄와 사고는 쌍둥이임을 눈감는 국가, 범죄와 사고를 통해 다치는 사람들은 항상 가장 약한 국민임을 외면하는 국가, 이런 국가가 무슨 소용인가? 가진 자와 더 가지려 드는 자, 탐욕과 출세를 위한 자들이 자행하는 국가의 도덕적 해이가 너무도 끔찍하다.

이명박정부를 흔히 ‘국가를 수익 모델로 운영했던 정부’라 일컫던 것도 모자라서, 박근혜정부는 ‘국가의 기본 기능을 망각한 정부’라는 발자취를 남길 것인가? 남은 것은 망가진 대한민국, 치유 불가능한 대한민국, 복원 불가능한 대한민국뿐일 것인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 국가적 보호가 절대적으로 가장 필요한 국민을 외면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 세상에 막장 드라마만 있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와의 접속 속에서 진실을 찾고 정의를 세우려 노력하는 경찰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시그널’에서 이재한 형사의 대사는 우리를 울컥하게 했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백 있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떵떵거리고 삽니까? 그래도 달라졌겠죠. 20년이 지났는데.”

그 분노 어린 절규에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희망을 품었을 때도 있었는데 이젠 이런 희망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게 만들 수 있다. 달라지게 만들어야만 한다.

<전 국회의원·도시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