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진학자가 소수에 머물던 시대에는 졸업장 자체가 의미 있었다. 하지만 대학 교육이 보편화된 90년대 이후에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한 경쟁이 극심해졌다. 학벌이 인생의 전부일 수 없고 심지어 출세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권력에 결탁되어 정도 이상의 혜택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고 그런 학벌중심 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적폐임이 분명하다.

한국의 대학들은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다. 상위 서열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은 사교육을 팽창시키고 공교육을 입시중심으로 변질시켰다. 그만큼 대학 서열 체계를 개혁하고 학벌중심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학벌사회 타파를 기치로 활동해 온 한 시민단체가 최근 공식적인 해체 선언을 하고 문을 닫았다. ‘학벌 없는 사회’는 해산 선언문에서 우리가 “여전히 학벌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학벌이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 아래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음을 토로했다. 학벌보다 자본의 독점이 더 지배적일뿐더러 심지어 학벌조차 휩쓸어 버릴 정도로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학벌과 권력의 연결이 느슨해진 결과 학벌을 가졌더라도 삶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8년간 이 모임이 한국 사회의 학벌중심 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데 기여해 온 점에서 갑작스러운 해산은 아쉬움을 남긴다. 더구나 해산 선언문에 피력된 해체 이유에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없지 않다. 애초 학벌 타파라는 문제 제기는 학벌의 권력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결탁되지 않은 권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속성인 한 이 운동은 학벌이라는 의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 극복 운동으로 이어질 때 내실을 얻게 된다. 자본 지배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활동을 접는다는 입장은 이 같은 운동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는 방증이 된다.

자본이 학벌을 압도하게 된 현실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무의미하게 된 시대라는 일반의 인식과도 상응한다. 그러나 학벌이 그만큼 의미가 옅어진 한편 역으로 더욱 자본력의 뒷받침을 받고 또 그것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었으며 학벌 쟁취를 위한 경쟁은 더욱 격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과 학벌의 결합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된 지금 시점이야말로 오히려 학벌 타파라는 명제가 자본 독점의 체제에 균열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학벌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문제라면 자본의 독점 강화를 해산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모든 탓을 자본에 돌리는 또 다른 환원론이 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학벌 타파 주장은 학벌의 중심 거점인 대학에 대한 이해에서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대학은 단순히 학벌을 생산하고 학위를 통해 권력을 확산하는 그런 곳만이 아니다. 지식 생산의 장이고 시민 교육의 터전이며, 한 사회의 문화의 담지자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 기구이기도 하다.

세칭 일류대는 학벌주의 폐해의 정점에 서 있기도 하지만 국가 전체의 공익을 위한 학문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거기서 발원한 동류의식은 파벌만이 아니라 학풍이나 학파의 형성을 위한 토대가 된다. 단순히 일류대를 없애고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자본의 독점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한 이에 맞설 힘도 이 구조 속에서 창출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자본에 포위되어 죽었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혁해 나가야 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학벌조차 사회 변혁을 위해 동원될 수 있다는 인식과 전략이 필요하다.

학벌중심 주의를 뒷받침하는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키고 그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대학 개혁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비록 운동 단체로서 ‘학벌 없는 사회’는 해산했지만, 학벌 문제를 대학 개혁의 과제와 연결 짓고 학벌로 인한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운동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