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의 지식인 고운(孤雲) 최치원을 흔히 경주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서유구가 쓴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에 의하면 전북 옥구 출신이다. 최치원은 자신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서문에서 열두 살 때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는데, 부친 최견일이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공부를 독려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운집’(孤雲集)의 ‘가승’(家乘)에 따르면 최치원이 당나라로 떠난 것은 경문왕 8년(868년)이었다. 경문왕은 삼국유사 ‘기이(奇異)편’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임금이다.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후 갑자기 귀가 나귀의 귀처럼 길어졌는데, 유일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복두장(두건을 만드는 장인)이 죽기 직전 도림사(道林寺)의 대밭 속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다. 그 후 바람이 불면 같은 소리가 났는데, 이 일화에는 경문왕은 감추려 했지만 신라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문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헌강왕에 대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가장 번성했던 시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때 “서라벌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는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면서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삼국사기 헌강왕 6년(880년)조에도 사방에 노래와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중 민공(敏恭)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안정되었으니 성덕의 소치입니다”라며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그러나 이로부터 불과 9년 후인 진성왕 3년(889년)조에 삼국사기는 “여러 주군에서 공부(貢賦)를 내지 않아서 재정이 궁핍해져 왕이 사신을 파견해서 독촉했더니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라고 적어 큰 위기에 빠졌음을 전하고 있다. 김부식은 그 이유에 대해 진성여왕이 각간 위홍과 내통하고 미남자 두세 명을 끌어들이는 등 황음(荒淫)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여왕을 거부하는 편견이 개재된 것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후 큰 사면을 베풀고, 여러 주·군의 세금을 1년간 면제하는 등 선정을 베푼 임금이었지 황음으로 나라를 망친 군주는 아니었다.

불과 9년 전에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는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신라는 통일 이후 국토는 넓어지고 세금은 늘어났으며 실크로드 무역의 이익까지 차지했지만 그 이익은 서라벌 중심의 일부 진골과 특권층만 누리는 열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화학적으로 통합하고, 고구려·백제 옛 강토 회복에 힘써야 했지만 진골 카르텔은 그럴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진골 카르텔이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면서 옛 백제·고구려 지역의 대다수 민중 생활은 황폐해졌다. 최치원처럼 백제 출신의 6두품 지식인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국제적 지식인이었지만 쓰일 곳이 없었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진성여왕 즉위 이후 임계점에 달해 폭발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11개 조의 시무책을 작성해 올리게 하고 그를 아찬으로 삼았지만 이 또한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으며, 산림과 강가, 해변을 소요 방랑하며….” 여생을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발적인 은거가 아니라 진골 카르텔에 의한 강제 퇴출인 셈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신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 규모는 크게 성장했지만 그 열매는 소수 카르텔이 독점함으로써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능력보다는 출신 성분이 중시되는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제는 누가 이 과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지난 총선에서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든 유권자들이 명령한 것이 바로 이 과제를 해결하는 정당에 정권을 주겠다는 예고가 아닌가 싶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