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룡 시인·문학들 발행인]영화 ‘동주’, 염치없는 세상에서 글쓰기
2016년 04월 04일(월) 00:00 가가
학동에는 학이 없다. 출판사 창문에 햇살이 드는 오후, 광주천도 반짝인다. 흐르는 그 물은 본래의 물이 아니다. 걸러낸 오수가 다시 흐를 뿐. 그래도 물풀은 자라고 물고기들은 헤엄친다. 왜가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한참을 버티고 있다. 볕은 따사롭고 버들강아지들은 하늘거린다. 또 봄이 온 것이다.
밀린 원고를 뒤적거려 본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집중하려고 커튼을 친다. 빛이 차단된 공간에서는 햇살, 나무, 풀, 별, 달, 하늘, 물과 같은 말들이 그리워진다. 말들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더듬이는 금세 먼지의 무게를 못 이기고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러다가 바람 한 줄기처럼 아주 소박하고 귀한 대목에 불현듯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된다.
“내 손아귀를 바라본다/ 한 끼 분의 쌀을 풀 만큼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쌀 만큼이다/ 심장을 받쳐 들 만큼이다/ 가만히 합장하여 본다/ 오 평생 비어 있기를…”
성명진의 시 ‘손’이다. ‘염소’라는 시의 구절은 이렇다.
“살면서 염소 한 마리를 이끌고 왔다/ 염소는 자주 버티었다/ 내가 염소를 따라 걷기도 했다(중략)/ 자주 뿔을 세우지만/ 꼬리를 떨곤 하는 염소 한 마리랑/ 나는 지금도 걷고 있다/ 길 양쪽을 나눠 걸을 때/ 둘은 햇살을 향해 나란하다.”
염치가 있다. 가끔 ‘문청’들과 시간을 나눌 때가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왜 글을 쓰려 하느냐고 묻는다. 대개 거들먹거리는 치들 중에 글 잘 쓰는 자 없다는 말도 꼭 해 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요즘 ‘윤동주’가 화제다. 5억을 들여 만든 저예산 영화 ‘동주’가 관객 100만을 넘어섰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를 소재로 한 연극, 뮤지컬, 콘서트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는 학창 시절 내가 속한 문학회의 ‘회가’(會歌)이기도 했다. 최루탄으로 분칠을 하고 돌아와 주막집 뒷방에서 눈물 콧물 범벅으로 부르던 노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먼저 터져 나오던 노래.
‘서시’는 전사가 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4박자가 아닌 6박자의 느려 빠진 가락으로 행진을 할 군대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안팎에선 주막집이 떠나갈 듯 투쟁의 함성이 솟구치는데, 별이 보일 리 만무한 뒷방 구석에 코 박고 앉아 훌쩍이고 있으니,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심약한 가슴에 와 안길 리도 만무했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중략)/ 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영화 속 윤동주는 자신보다 먼저 시인이 된 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조선어로 시를 쓰지 못하는 시대,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시대,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이 영화가 흥행(?)을 한 것이라면, 영웅이 아닌 살아있는, 살아가는, 살아내는 한 개체이자 주체인 윤동주를 그리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젊은 날 심약한 ‘문청’들의 밤이 마냥 ‘회의적’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마치 영화 속에서, 싸우는 몽규와 회의하는 동주가 그랬듯이 말이다. 문제는 그 회의의 결말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다.”
일본 형사 앞에서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했던 윤동주는, 광복을 6개월 남겨둔 채 스물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최후의 나’란 죽음과 직면할 때의 ‘나’다. 그것은 순간순간 ‘최초의 악수’를 할 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나’일 것이다. 그것은 ‘염소 한 마리랑’, “길 양쪽을 나눠 걸을 때/ 둘은 햇살을 향해 나란하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타자와 대화할 줄 아는 자의 몫일 것이다.
대화는 내 것을 덜고 남의 것을 채우는 일이다. 외롭고 막막한 날, 천변 바위틈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아 물끄러미 흘러가는 물을 바라본다. 걸러진 물이라서 다행이다, 그나마 과거를 돌아볼 수 있으니. 바람이 불 때 물살이 이는 것도 행복이다, 아직 최후는 아니니, 살아있으니. 물이 햇살을 안는 것을 본다. 햇살이 물고기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본다. 내가 눈을 뜨고, 눈을 감는 순간들을. 바람이 이 모든 것을 움직여 주니 좋다. 부끄럽다.
밀린 원고를 뒤적거려 본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집중하려고 커튼을 친다. 빛이 차단된 공간에서는 햇살, 나무, 풀, 별, 달, 하늘, 물과 같은 말들이 그리워진다. 말들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더듬이는 금세 먼지의 무게를 못 이기고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러다가 바람 한 줄기처럼 아주 소박하고 귀한 대목에 불현듯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된다.
성명진의 시 ‘손’이다. ‘염소’라는 시의 구절은 이렇다.
“살면서 염소 한 마리를 이끌고 왔다/ 염소는 자주 버티었다/ 내가 염소를 따라 걷기도 했다(중략)/ 자주 뿔을 세우지만/ 꼬리를 떨곤 하는 염소 한 마리랑/ 나는 지금도 걷고 있다/ 길 양쪽을 나눠 걸을 때/ 둘은 햇살을 향해 나란하다.”
요즘 ‘윤동주’가 화제다. 5억을 들여 만든 저예산 영화 ‘동주’가 관객 100만을 넘어섰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를 소재로 한 연극, 뮤지컬, 콘서트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윤동주의 ‘서시’는 학창 시절 내가 속한 문학회의 ‘회가’(會歌)이기도 했다. 최루탄으로 분칠을 하고 돌아와 주막집 뒷방에서 눈물 콧물 범벅으로 부르던 노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먼저 터져 나오던 노래.
‘서시’는 전사가 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4박자가 아닌 6박자의 느려 빠진 가락으로 행진을 할 군대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안팎에선 주막집이 떠나갈 듯 투쟁의 함성이 솟구치는데, 별이 보일 리 만무한 뒷방 구석에 코 박고 앉아 훌쩍이고 있으니,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심약한 가슴에 와 안길 리도 만무했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중략)/ 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영화 속 윤동주는 자신보다 먼저 시인이 된 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조선어로 시를 쓰지 못하는 시대,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시대,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이 영화가 흥행(?)을 한 것이라면, 영웅이 아닌 살아있는, 살아가는, 살아내는 한 개체이자 주체인 윤동주를 그리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젊은 날 심약한 ‘문청’들의 밤이 마냥 ‘회의적’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마치 영화 속에서, 싸우는 몽규와 회의하는 동주가 그랬듯이 말이다. 문제는 그 회의의 결말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다.”
일본 형사 앞에서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했던 윤동주는, 광복을 6개월 남겨둔 채 스물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최후의 나’란 죽음과 직면할 때의 ‘나’다. 그것은 순간순간 ‘최초의 악수’를 할 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나’일 것이다. 그것은 ‘염소 한 마리랑’, “길 양쪽을 나눠 걸을 때/ 둘은 햇살을 향해 나란하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타자와 대화할 줄 아는 자의 몫일 것이다.
대화는 내 것을 덜고 남의 것을 채우는 일이다. 외롭고 막막한 날, 천변 바위틈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아 물끄러미 흘러가는 물을 바라본다. 걸러진 물이라서 다행이다, 그나마 과거를 돌아볼 수 있으니. 바람이 불 때 물살이 이는 것도 행복이다, 아직 최후는 아니니, 살아있으니. 물이 햇살을 안는 것을 본다. 햇살이 물고기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본다. 내가 눈을 뜨고, 눈을 감는 순간들을. 바람이 이 모든 것을 움직여 주니 좋다. 부끄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