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9일간 진행된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한국 의회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다. 국회방송을 통해 생중계된 이 무제한 토론을 접한 국민들은 해당 법안의 내용과 그 문제점만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왜 위기에 빠졌고 국가안위가 왜 위태로워졌는지 알게 되었다. 보수정권 8년의 실정이 어떻게 극심한 양극화와 남북대결을 초래하여 이 나라를 위험국가로 만들었는지 듣게 되었다. 의사진행 방해가 그 목적인 필리버스터가 뜻하지 않게도 국민 일반을 위한 정치교양 강좌가 된 셈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삼지만 다수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두고 있고 필리버스터도 그 중 하나다. 필리버스터가 효율적인 입법 활동을 가로막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비판은 서구에서도 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제도는 소수 의견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기 때문에 2백 년 이상 존속되어 왔다. 이 유서 깊은 제도가 여야 간 협의와 조정이라는 의회의 기본 기능조차 무너진 한국의 현실에서 그 본분을 십이분 발휘한 것이다.

사실 의회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굳이 필리버스터가 중요한 정치 행동으로 선택될 이유가 없다. 가령 영국의회에서 입법 사항이나 정치 쟁점은 여야 의원들의 자유롭고 충분한 토의를 거친다. 발언에는 저마다의 전문적 식견과 정치적 경륜이 풍겨나고 의회는 위트와 유머와 풍자가 속출하는 말의 향연장이 된다. 그리고 이 현장은 시민에게 개방되고 방송을 통해 중계된다. 필리버스터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황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번 필리버스터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드물게도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환기시켜 준 것이다. 영국의회가 토론과 타협의 모범적인 정치문화를 보여준다 해도, 과연 의회에서의 합의가 한 국가의 정치 영역의 전부일까? 애초 영국 의회제도의 축이라고 할 두 당파, 즉 토리와 휘그는 각각 토지자본과 산업자본을 대표했고 대다수 민중은 이 민의의 전당에서 배제되었다. 영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 민중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오랜 싸움의 과정이기도 했다. 데모크라시 즉 ‘민중의 지배’라는 그 본령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나가야 할 지향점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이해관계의 조정이라는 통상적 의미의 정치를 ‘치안’(治安)이라고 지칭하고, 그것을 기성질서를 근본적으로 재배치하고자 하는 진정한 ‘정치’와 구분한다. 민주주의의 외양을 하고 있어도 다수 민중의 목소리가 외면당하고 배제될 때 그것은 민중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뜻과 어긋난다. 들리지 않고 대변되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함으로써 굳어진 기득권구조를 변혁하려는 운동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고, 그것은 조정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불화를 전제한다. 이 때문에 정치권의 타협이 민중을 배신하는 야합이 되는 일도 흔히 일어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어디에 와 있는가? 랑시에르가 말하는 진정한 정치는커녕 치안 즉 타협을 통한 이해관계의 조정조차 일방적이거나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다. 대화와 토론이 부재하는 곳에서, 치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집권당은 대화를 해낼 능력 자체를 상실했고 정치의 부재를 추궁해야 할 언론은 ‘싸움만 일삼는 국회’라는 프레임으로 국민의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필리버스터는 바로 이 정치 부재의 현실 속에서 억눌려 오던 야당 의원들의 정치 욕망이 화산처럼 분출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들을 열정적으로 쏟아 놓았고 정치의 원뜻을 되새기며 그 회복을 주창하였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 혹은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이들과 함께 할 뜻을 토로하였다.

물론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이 원안대로 통과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고, 언론의 흠집 잡기는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그럼에도 필리버스터는 우리 사회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