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남산을 백 분가량 걸었다. 추웠던 겨울날들이 지나가며 느껴지는 봄, 그 산뜻한 공기 마시는 재미에 걷노라니 ‘봄비’ 노래가 떠오른다. 봄기운 여파인지, 오랜만에 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쁨도 작용했을 것이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그때 그날은 그때 그날은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시간 너무나 아쉬워…”

나로서는 봄맞이 의식처럼 홀로 흥얼대며 부르던 이 노래가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온다. ‘내부자들:디 오리지널’(우민호 감독, 2015)에서 수차례 들었던 이 노래의 잔영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한국 영화를 결산하노라면 수저계급론의 반작용이 강하게 다가온다. 한국 영화의 주력 액션영화 계보에도 수저계급론에 대한 분노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 징후를 강력하게 드러낸 ‘베테랑’(류승완 감독, 2015)을 보노라면 현실에서 벌어진 특권층의 범죄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이를테면 항공기 땅콩 사건의 작태를 저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은 불공정한 현실을 정의로운 허구로 처벌하는 대리만족 효과를 주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관객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던 ‘내부자들’이 감독판으로 새해맞이 극장에 걸리면서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흥행 성적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끼’와 ‘미생’으로 잘 알려진 윤태호 작가가 2012년 ‘한겨레’에 연재했다 중단한 웹툰을 원작으로 탄생한 이 영화의 매력은 팍팍 튀는 연기력 대결, 코믹한 명대사 등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있다. 예를 들어, 출세를 꿈꾸며 섬기던 언론 거물에게 배신당하자 복수혈전을 벌이는 깡패 안상구(이병헌)의 입에서 나온 대사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마실까요?”는 이미 유머 인용구로 유행어가 돼 버렸다. 대한민국 정·재계 밑그림을 그리는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가 읊조리는,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집니다” 는 매우 기분 나쁜 대사지만 의미심장하게 울린다.

실력보다 족보가 중시되는 특권층에 질린 의로운 우장훈 검사(조승우)와 배신당한 정치 깡패의 복수심이 결합하여 짜 나가는 범죄 스릴러 ‘내부자들’의 맛은 지금 돌아가는 대한민국 현실과 허구의 상관관계에서 나온다. 지난해 키워드로 선정될 정도로 퍼진 ‘헬조선’의 근거인 ‘수저계급론’은 이 영화에서 ‘족보론’으로 변형된다.

정계·재계·언론계가 결합한 콘크리트 같은 삼각 구도, 그런 남성 특권층이 누리는 성접대 관습, 거기에 동원되는 여성 연예인 인권 문제도 허구 이미지의 은닉된 밑그림처럼 하나둘 떠오른다. 이건 허구 영화지만,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과 정황들, 현실의 부조리를 한 겹씩 까 나가는 스릴러 특유의 재미를 전해 준다.

어떤 영화의 감독판이 개봉되는 경우는, 극장 상영판에서 잘려 나갔지만 더 보고픈 관객의 기대와 더 보여 주고픈 감독의 욕망이 결합할 때 발생한다. 영화사에 남는 SF걸작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감독)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1982년 ‘E.T.’(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와 같은 해, 같은 장르로 개봉한 이 작품은 흥행에서 ‘E.T.’에 참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아 관객층에게 ‘저주받은 걸작’이란 지지를 얻게 되자, 10년이 지난 1992년 확장된 감독판으로 극장에 개봉되는 기록을 세웠다. 흥행 수치 중심의 영화산업 생태가 이렇듯 ‘저주받은 걸작’으로서 감독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들: 디 오리지날’ 감독판은 ‘흥미진진 흥행작’의 부활이란 점에서 다르다. 감독판이 내건 ‘대한민국을 강타한 권력가들의 진짜 이야기’라는 선전 문구는 속과 겉이 다른 정치공약 현실에 질린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이 허구 영화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한국형 범죄 스릴러의 활성화는 현실의 부정의를 먹고 사는 아픈 거울로서 영화의 힘과 매력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