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호라는 인디언 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한다. 초겨울이 시작되는 시기라 만물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14일에는 다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여준 큰 일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어느 쪽에서는 ‘민중 총궐기’라 하고, 어느 의학생은 ‘만민공동회 집회’라 했으며, 한 정당에선 ‘불법폭력집회’라 했던 바로 그 집회 말이다. 명칭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날 있었던 것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를 내게 보여주었고, 그래서 마음이 잠시 뜨거웠다.

특히 ‘만민공동회’라 지칭한 의학생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의미를 적확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치지도외로 하고 의학도의 입장에서, 응급 환자의 구급차에 물대포를 발사하여 이송을 지연시킨 행위에 대하여 인술의 철학을 그렇게나마 공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보신에 매우 민감하며, 겨우 안방 대장인 나는 부당한 세상사를 적당한 독설로 자위하고, 적절한 욕설로 미장하면서, 적어도 시대의 정의에 편승할 줄을 안다는 것 정도를, 내 시민권의 참여의 보루로 삼아 그 공간을 끝내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집안에서나 강의실에서나 약간의 비판적 견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부모와 선생으로서 대사회적 의무를 다한 것으로 위장한다.

그래서 가끔 맞닥뜨리는 정론 직설에는 거북하기만 하며, 사실 주눅까지 들고, 회피한다. 그 중 하나가 허균의 ‘성소부부고’인데, 11권에는 모두 잘 아는 ‘호민론’이 실려 있다. 이 놀라운 혁명가의 분류에 따르면 나는 ‘초라한 항민이거나 엉거주춤한 원민’일 것이다. 장기판의 차로 졸 치기, 그 졸에 해당함에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가끔 ‘포’나 ‘상’ 정도로 대접 받으려고 하는 무엄을 저지른다. 죽어서 허균을 만나면 그는 이런 내게 뭐라고 질책할까. 과연 그와 만날 품수나 될까.

700여 대의 경찰버스와 20여 대의 트럭을 차벽으로 한 견고무비로 용맹스러운 우리 경찰들의 서슬 퍼런 눈길과 맞서며 행진하는 많은 시민과 각급 학교 학생들을 인터넷 방송의 생중계로 보며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정치인 말마따나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자기 패배주의와 이기주의라는 비애국적 사상에 물든 학생들만 있어서, 그들의 선배들이 만들어 온 민주를 지킬 정의감은 조금도 없고, 오로지 취업에만 올인하는 존재들이 오늘의 학생들이라고 은연중에 나는 편파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오포 세대’, ‘헬 조선’, ‘금수저 은수저’ 등으로, 나처럼 꼭꼭 숨어 엎드려 낮은 소리만 내는 ‘안방장군이나 골목대장’만 있다고 생각한 내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산산조각 내주었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쳐’ 줘서 ‘이제 다 사라진 것은 아님’을 내게 알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오랫동안 잊었던 친구의 편지만큼이나 반갑고 감격스럽다.

미국 인디언 족들은 또 12월을 ‘존경하는 달’과 함께 ‘다른 세상의 달’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우리도 ‘섣달’이라는 어원조차 생소한 명칭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명명한다. 설이 있(을)는 달이라서 그렇게 일컫는다고 하지만, 인디언 언어처럼 뭔가 의미 있고 멋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왜 호피족 그들은 존경하는 달이라고 했을까?

문득 그 존경의 대상이 궁금하다. 존경의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큰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도 이즈음 세태에서,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존경할 만한 존재들을 잃거나 없애거나, 더 정확하게는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이 아닌가? 데리다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천 개의 고원쯤이며, 우리는 유목민으로 그곳에 기생해 있다가 다른 것으로 옮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서 그럴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 넘어서야 해서 그러는가, 나를 세우기 위하여!

그러나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날 광화문과 시청 광장에 있었던 그들 모두와 지금도 죽음을 헤매는 농부를 존경해 보련다. 그러면, 혹 내 방 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