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정조의 역사 왜곡
2015년 11월 03일(화) 00:00 가가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 교정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다. 또 캠퍼스 내의 암병원 6층 테라스에서는 250여 년 전 ‘임오화변’의 현장인 창경궁의 문정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종종 학생들과 함께 경모궁과 창경궁을 탐방하곤 한다. 역사의 무게와 진실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영조실록’ 1776년 2월 4일자에는 다음 기사가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져 사람들의 이목을 어지럽히니, 신의 마음이 애통합니다. … 나라의 중요한 일은 모두 간첩(簡牒)에 적은 뒤 금궤에 넣어 명산에 보관해서 세월이 지나도 고칠 수 없으니,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일기를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세손(정조)이 임금(영조)에게 올린 상소로, ‘승정원일기’ 가운데 사도세자에 관한 불미스러운 기록들을 지워달라는 요청이다. 이에 대해 영조는 곧 허락했다. 요즈음 같으면 삭제한 사실조차 모르도록 처리했겠지만, 다행히 당시에는 삭제한 곳곳마다 “임금의 분부로 지웠다”라고 표시했다. 따라서 지워진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어느 날의 기록이 삭제되었는지는 알 수 있어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명산의 사고에 보관하는 간첩, 즉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남으므로 문제될 게 없다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승정원일기는 지워달라고 영조에게 간청했고, 영조는 같은 이유로 손자의 소원을 받아들였다. 그럼 실록은 무사했을까?
‘정조실록’ 1781년 3월 7일자를 보자. “‘10년 동안의 실록은 총재관이 직접 엮었으니 교정할 일은 없다. 대신이 정리해서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원임 대제학의 손을 거쳤으므로 첨삭해서는 안 된다.’ …이에 앞서 총재관 이휘지가 대제학으로서 편찬을 주관했는데, 임금이 1758년 이후 10년 치의 승정원일기를 이휘지에게 주고 찬수를 맡겼다. 그리고서 아무도 참견 못하도록 지시했는데 이제 실록을 간행하는 일이 한창이므로 하교한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문제의 시기의 편찬을 이휘지 한 사람에게 일임했다. 영조실록 편찬 과정을 연구한 오항녕 교수는 이렇게 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특정 시기를 특정 인물에게 찬수하게 했던 사례가 더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이 정조가 이휘지에게 편찬 자료로 준 승정원일기는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세자에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휘지가 편찬한 것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엄명을 내렸다.
세종은 ‘태종실록’을 열람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거두었다. 앞서 태종이 ‘태조실록’을 보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변계량 등은 “전하께서 보신 뒤에 다시 내려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역사라고 의심할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임금은 선왕(先王)의 시대를 기록한 실록을 볼 수조차 없는 것인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찬 과정에 직접 관여하다니!
이제 역사 왜곡의 마지막 제3막이다. 1789년 10월 16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사도세자의 새 유택, 현륭원이 완공되었다. 이에 맞춰 정조는 사도세자의 전기 격인 ‘현륭원지’를 썼다. 승정원일기를 세탁하고, 국정 역사서인 영조실록을 ‘올바르게’, 즉 자신의 입맛대로 만든 위에 아버지를 성군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정조는 문종·세종·영조와 더불어 학식이 가장 뛰어났던 임금이다. ‘춘추’와 ‘사기’ 등 역사서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와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일자 무식쟁이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왜곡을 거듭 자행했을까? 정조는 이유야 어떻든 명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했고, 또 그런 만큼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미화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이라면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아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남편인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은 빙애나 비슷하게 목숨을 빼앗긴 내인·환관들에 비할 것인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거듭 죽이는 셈이다. 애민(愛民)과 인정(仁政)을 내세우는 조선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조는 생부의 만행이 가려지지 않으면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짐이 곧 국가’이던 시대에 국가 안보를 위해 부득이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정조는 그래도 선악을 분간할 줄 알아서 아버지의 비행을 감추고 지우려 했다. 하지만 그런 분별력도 없어 악행을 선행이라고 우긴다면? 끔찍한 일이다.
정조의 시도는 잠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비치지만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어리석음과 무모함만이 뚜렷할 뿐이다. 누구든 역사를 희롱하다가는 역사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정조는 반면교사다.
‘영조실록’ 1776년 2월 4일자에는 다음 기사가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져 사람들의 이목을 어지럽히니, 신의 마음이 애통합니다. … 나라의 중요한 일은 모두 간첩(簡牒)에 적은 뒤 금궤에 넣어 명산에 보관해서 세월이 지나도 고칠 수 없으니,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일기를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문제의 시기의 편찬을 이휘지 한 사람에게 일임했다. 영조실록 편찬 과정을 연구한 오항녕 교수는 이렇게 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특정 시기를 특정 인물에게 찬수하게 했던 사례가 더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이 정조가 이휘지에게 편찬 자료로 준 승정원일기는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세자에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휘지가 편찬한 것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엄명을 내렸다.
세종은 ‘태종실록’을 열람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거두었다. 앞서 태종이 ‘태조실록’을 보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변계량 등은 “전하께서 보신 뒤에 다시 내려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역사라고 의심할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임금은 선왕(先王)의 시대를 기록한 실록을 볼 수조차 없는 것인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찬 과정에 직접 관여하다니!
이제 역사 왜곡의 마지막 제3막이다. 1789년 10월 16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사도세자의 새 유택, 현륭원이 완공되었다. 이에 맞춰 정조는 사도세자의 전기 격인 ‘현륭원지’를 썼다. 승정원일기를 세탁하고, 국정 역사서인 영조실록을 ‘올바르게’, 즉 자신의 입맛대로 만든 위에 아버지를 성군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정조는 문종·세종·영조와 더불어 학식이 가장 뛰어났던 임금이다. ‘춘추’와 ‘사기’ 등 역사서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와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일자 무식쟁이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왜곡을 거듭 자행했을까? 정조는 이유야 어떻든 명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했고, 또 그런 만큼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미화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이라면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아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남편인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은 빙애나 비슷하게 목숨을 빼앗긴 내인·환관들에 비할 것인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거듭 죽이는 셈이다. 애민(愛民)과 인정(仁政)을 내세우는 조선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조는 생부의 만행이 가려지지 않으면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짐이 곧 국가’이던 시대에 국가 안보를 위해 부득이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정조는 그래도 선악을 분간할 줄 알아서 아버지의 비행을 감추고 지우려 했다. 하지만 그런 분별력도 없어 악행을 선행이라고 우긴다면? 끔찍한 일이다.
정조의 시도는 잠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비치지만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어리석음과 무모함만이 뚜렷할 뿐이다. 누구든 역사를 희롱하다가는 역사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정조는 반면교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