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 주세요.” 어린 아들이 역사학자인 자신에게 던진 질문으로 마르크 블로크(1886∼1944)는 자신의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의 서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탁월하면서 간결하고 정직한 이 질문은 결국 역사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라고 설명한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와 지리학을 전공했던 마르크 블르크는 1차대전에 참전한 후, 스트라스부르 대학을 거쳐 소르본느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후에 ‘아날’학파로 명명되는 역사학의 새로운 방법과 분야를 창시하기도 한 마르크 블르크는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도 참전하여 파리 방어 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파리 방어 작전에 참여했던 당시의 일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날은 바로 1940년 6월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던 날이었다. 우리 사령부가 군대를 잃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노르망디 지방의 정원에서 우리는 이 참담한 패배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하나가 ‘역사가 우리를 배반했다고 생각해야 될까?’하고 중얼거렸다.”(‘역사를 위한 변명’ 서문)

이 두 가지 의문, 즉 어린이의 호기심과 어른의 고뇌에 대답하기 위해 마르크 블르크는 나치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복무하면서 한편으로는 ‘역사를 위한 변명’의 저술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저서를 완결하지 못한 채 나치에 붙잡혀 1944년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 저서에서 역사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 속의 인간들에 관한 학문’이며,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며, 따라서 그것은 움직이는 그 무엇’이라고 강조한다.

궁형을 당한 치욕으로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이 마를 날이 없었던 사마천은 ‘사기’의 「백이열전」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던 도척은 부유하게 살면서 장수를 누렸지만, 도의와 절개를 지켰던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은 사실을 들어 과연 ‘천도란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가는 이처럼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회의를 거치면서 ‘역사’에 대해 고민했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역사를 이용하거나 장악하려 하지 않았던 이들의 작업은 인류의 자산으로 승화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요즘 말로 하면 ‘국정교과서’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유교적 입장에서 서술된 시각이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만일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역으로 우리 역사는 매우 빈약해졌을 것이라고 말해진다. 이처럼 역사는 단일한 입장과 해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고 풍요롭게 읽혀질 때, 그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것이다.

파리를 점령당했을 때 마르크 블르크가 던졌던 질문, ‘역사가 우리를 배반했을까?’는 우리 선조들도 떠올렸던 질문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이 논밭을 빼앗아 가버렸고, 광복이 되어 기뻐했는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더니 남북이 나뉘어 버리는 일을 보면서 틀림없이 이런 의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위한 변명’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했던 우리 선조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다시는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해서는 안 될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든가, 차악의 길이라도 선택했어야 했다는 ‘변명을 위한’ 역사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학자를 배제한 ‘역사 교과서’가 이 위험에 빠질 우려가 큰 까닭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