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밤, 구로 아트밸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막 보고 온 다큐멘터리 ‘위로공단’(2015, 임흥순) 이미지에 자극받아 그런 것이리라. 포스터에는 하늘이 트인 황량한 곳에 눈 가린 여자가 서 있다. 천천히 보면 그녀 뒤로 뭔가 작업하는 두 여자가 보인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는 여공일까? 그런데 그녀는 왜 눈을 가렸을까? 호기심이 인다.



2009년 ‘여성주간’ 기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던 씨네콘서트는 힘들어도 즐거운 일이지만, 구로 아트밸리 공연만은 유독 다르게 다가왔다. 여공시대는 ‘호스티스 영화’와 더불어 넘겨진 과거 어두움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구로공단 그 자리, 여공들이 살던 그곳이 ‘디지털 단지’가 되었지만, 막상 가서 공연하려니 먹먹해졌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무지한 자신을 책망하며 고민하는데 평소 외우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고교 시절, 글쓰기의 묘미를 일깨워 주신 시인 문정희 국어 선생님의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바로 그 시.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언제 읽어 봐도 현실적 비애감이 울려오는 그 시를 교복 입은 졸업 앨범 사진과 몽타주해서 읽으며, 여학생이 여공일 수도 있다는 내게 유리한 최면을 걸며 씨네콘서트를 치러 냈다.

그런데 ‘위로공단’을 보노라니, 그 기억을 타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여자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 그녀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왜 그래야 하는지 탐구하고픈 열망이 피어난다. 다큐 도처에 그런 자극이 만발한다.

구로공단 여공의 일은 이제 캄보디아 여공들이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최면에 걸려 12시간 이상 일하며 고행 길에 들어선 여공들은 이제 비정규직으로 폭넓게 이동한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유럽이나 미국 국적 비행기에는 튼튼해 보이는 바지 입은 여승무원도 있다. 그런데 왜 한국 국적 비행기엔 유독 여린 체구의 치마 입은 여승무원 다수가 감정 노동을 미적 노동으로 소화하며 지쳐 떨어지는지, 다큐를 보노라면 이해하게 된다.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언니들도 가슴 저린 경험담을 토로한다. 결제 카드를 내던지는 손님도 있고, 또 어떤 손님은 데려 온 아이에게 “너 공부 안 하면, 이런 데서 일하게 된다”고 말한다니. 이걸 전해 듣노라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저급한 인권 수준에 직면하게 된다. 나라도 그런 행동 안 하는 게 다행이라는, 그 생각 자체도 서글프다.

40년간 봉제공장 ‘시다’로 일하신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아 세계 도처에 얼굴을 가린 모든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 다큐는 ‘아시아 여성들의 노동조건과 관계된 불안정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수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 도처 미술관과 극장으로 나가고 있다. 분명 지금보다 더 처연하고 아팠을 일제 강점기, 최초의 대중가요로 유행가가 된 ‘희망가’로 장식하는 에필로그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여 지금도 듣는다. 유튜브에 접속하면 여러 가수의 여러 버전으로 듣을 수 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담소 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니/ 희망이 족할까”

제목처럼 이 작품은 위로를 준다. 위로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 내는 창조 놀이, 예술의 기술에 감사하며 여러분도 이 다큐를 극장에서 만나 보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