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갈등공화국이다. 한국의 인구 대비 소송 건수는 일본의 4배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타협과 양보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전경련 조사에 의하면 사회갈등은 OECD 27개 국가 중 두 번째로 심각하며, 갈등처리 비용도 최저 82조 원에서 246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적 신뢰가 거의 바닥인 나라에서 구성원들이 공공의 이익을 생각하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애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거의 망국적인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몇 개 들린다. 최근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와 그 업계 사용자들이 실업자·비정규직·영세노동자·이주노동자 등의 교육비 지원과 권리 보호, 제도 개선을 위해 쓸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난 7월 24일 노조 측은 지부 집단교섭에서 이런 안에 합의했고, 계획 중이던 파업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연대기금은 노조 측이 먼저 제안했다. 노조는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고통을 받는 지역민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마련한 요구안”이라고 설명했다. 노조가 앞장서서 자신들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 마련에 나선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SK하이닉스는 7일, 임금 인상분의 20%를 협력사 직원의 처우와 안전·보건 환경 개선에 지원하는 ‘상생협력 임금공유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마련된 재원은 하청계열사 직원 4000여 명의 임금 인상, 복리 후생 등 처우 개선과 안전·보건 환경 개선 투자비용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경우는 사 측이 먼저 제안했다. 사 측은 반도체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업계의 리더십을 만들어 나감과 동시에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을 위한 모델까지 만들어 내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대기업의 노사가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열악한 중소기업에 지원하기로 한 결정은 한국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의미 있는 일이다.

한편, 지난 5월 광주시는 사회협약을 통한 광주형 일자리 창출 모델 구축을 지원하기 위해 전남대에 사회통합지원센터를 설치하였다. 광주시는 우리 사회의 갈등 해소를 위한 ‘광주형 상생 사회·경제적 모델’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광주시는 노사민정 협의회를 열고 일자리 문제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 비정규직 고용, 처우 개선 등도 추진한다고 한다. 지자체 차원에서 관이 주도하여 노조, 시민사회와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의 사회통합을 추진하는 일도 한국에서는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비록 제안 주체는 각각 다르지만 이 모든 몸부림은 이대로 가다가는 노조나 기업, 그리고 지역사회가 동시에 무너질 것이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것 같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제조업 경쟁력이 추락하고 있고, 소비는 살아나지 않는다. 100만 명이 넘는 실업청년들은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발휘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거리에서 방황하고 골방에서 좌절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의 기관차인 중소기업이 거의 죽어가고 있고, 영세 상인들은 하루하루를 버티기 어렵다.

이러한 노사의 양보와 타협, 사회통합의 시도는 사실 동료 이해집단으로부터 욕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생태계 회복은 물론 사회 건강성 회복을 위해 이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경제는 사회의 일부다. 사회의 인프라인 신뢰, 기술, 청년의 열정이 받쳐주지 못하고, 대다수 노동인구가 비정규직, 알바가 되면 대기업만 혼자 좋아질 수가 없고, 좋아지더라도 그런 대기업이나 경제는 국민 대다수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다. 골목시장의 영세 자영업자가 사라지고 노조가 순종하거나 무기력해지면, 기업 측은 이제 장애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없어지니 다음에는 기업이 무너질 차례다.

민노총, 한국노총 소속 정규직 노조가 더 적극적인 연대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그게 노조가 살 길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고액연봉자들이 더 많이 내놓아야 한다. 임금, 성과 공유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