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뜨겁고 사방이 건조하다. 오래 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데이비드 린)에서 봤던, 싯누렇고 광활한 사막의 열풍에 휘날리던 장옷 이미지가 순간 떠오른다. 메르스가 유독 한국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것을 분석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들어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전문가들 이미지를 접해서일까?

학교에도 열기 어린 바람이 분다. 마스크를 쓰고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도 있다. 누군가 기침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재난영화가 현실로’ 같은 기사가 난무하며 재난영화가 공공의 메타포가 되었다.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친다!’란 문구를 내걸었던 ‘감기’(2013, 김성수)를 재평가하는 열기가 일고 있다. 영화와 현실이 오버랩되면서, 관람 당시 상투성을 비난했던 점을 반성하는 글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극장가는 한산해졌다. 개봉을 연기한 영화들도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 조지 밀러)는 막강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창문인 영화 세상의 유사체험 매혹이 재난 코드에 점화된 것이리라.

핵전쟁으로 멸망한 미래 지구, “누가 미친 건지 알 수 없다. 나인지 이 세상인지…”로 포문을 여는 이 작품은 막강한 독재자 임모탄이 가끔씩 조금 내려주는 물을 받아먹으며 사는 노예 같은 사람들의 비참한 풍경을 보여준다. 임모탄을 지키는 워보이들은 맥스(톰 하디)를 끌고 다니며 피주머니로 활용하는 권력 광신도 집단이다.

여기에 여전사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등장한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며 탈주하는 임모탄의 다섯 아내를 숨긴 채 퓨리오사는 분노의 탈주를 벌인다. 물이 있는 녹색 땅을 찾아 나선 황사 속 탈주는 시청각을 사로잡는 액션 장면들로 펼쳐진다. 미친 맥스보다 더 격정적인 소명감에 빛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크린을 뒤흔든다. 권력남에게 기생하는 인생길을 가던 다섯 여자가 투사로 진화하는 과정은 약자들의 연대를 뜨겁게 보여준다.

이런 약자의 연대는 ‘괴물’(2006, 봉준호)에서도 관건으로 작동한다. 지난 5월 말, 폭스뉴스는 “한국 내 탄저균 유출로 미공군 5명, 미육군 10명, 정부계약인 3인, 시민 4명, 총22명이 치료 중”이라고 알려준다. 한국의 미 공군기지에 보낸 탄저균 샘플의 존재를 미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입을 빌려 보도한 것이다. 미군 측이 먼저 토로한 탄저균 배달 소식은 ‘괴물’의 첫 장면을 상기시킨다.

2000년 2월 9일, 푸른 톤의 실험실에 두 남자가 서 있다. “미스터 김, 나는 먼지가 제일 싫어요.”하며 상급자 백인이 김 씨에게 먼지 낀 병에 든 포럼 알데히드를 하수구에 쏟아 버리라고 지시한다. 그건 한강에 독극물을 버리는 것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렇게 유연하게 명령한다. 한강은 크고 넓으니 마음을 한강처럼 넓게 갖고 쏟아 부으라고. 6년 후, 그 결과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2000년 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에 영감을 얻어 상상해 낸 ‘괴물’은 다시 볼수록 우리 속 ‘괴물’을 폭로한다.

괴물 바이러스에 접촉하여 포획되었던 강두(송강호)는 전문가가 흘린 영어에서 ‘노 바이러스’를 알아듣는다. 거짓으로 통제하는 공권력을 벗어나 자력 구제에 나선 어리바리한 강두 가족의 탈주는 공포가 깃든 긴장감을 블랙코미디적 유머로 만들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재난영화로 보는 재해 현실’ 강의를 준비하며 영화를 다시 보다 발견한 한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폐쇄된 원효대교 주변부 한 구석, 노란 옷으로 방역 무장한 관리요원이 주위 눈치를 보며 슬며시 젖은 만 원권 지폐를 줍는다. 그런 모습은 세월호 선장의 유사 행동을 떠오르게 만든다. 재난 상황에서도 눈치 보며 돈을 챙기는 요원은 곧이어 괴물에게 잡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명확한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장면을 세월호 이전에 연출한 봉준호 감독의 솜씨에서 예술의 예지적 감성을 발견한다. 바로 이런 감성이 작동하기에 막강 권력의 파장 속에서 다수 약자의 불안과 좌절감, 저항의 욕망을 먹으며 재난영화는 나날이 성장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