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을 6개월 남겨둔 오늘까지도 전당의 운영 주체가 결정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결정이 되겠지만, 6개월은 개관을 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광주시민들은 기약없는 정치권의 합의를 기다려야 한다. 참으로 애석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문화정책을 포함한 공공정책을 집행하는데 준용되는 원칙으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있다. 이 표현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화선진국들이 공공정책을 집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원칙이다.

이 기준은 영국이 대영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를 창설하면서 정치권력과 행정조직으로부터 문화예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입하였다. 문화예술 단체와 예산을 지원하는 기관 간에 그 접촉의 거리를 ‘팔길이’보다 가까이하지 말라는 게 이 원칙의 요지다.

당시 영국은 지원을 빌미로 정부가 의도하는 문화예술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문화예술은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와 독일에서 시행된 국가 주도의 문화예술정책이 많은 문제점을 양산한다고 판단하였고, 관료에 대한 예술가들의 깊은 불신을 극복하고자 ‘팔길이 원칙’을 도입하였다. 영국의 문화예술 정책이 자유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팔길이 원칙’을 준용하면서 부작용도 나타났지만 영국의 문화예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곤 한다. 정부는 공공 예술을 지원하거나 문화예술기관을 운영할 때, ‘팔길이 원칙’을 준수한다고 천명한다. 그러나 문화예술을 포함한 공공 영역에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운영 주체를 결정하면서 ‘국립’이라는 명칭에도 ‘지역’을 따지는 정부를 보면, 문화예술 분야에서 ‘팔길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팔길이 원칙’은 문화예술 기관의 운영이나 문화예술계의 지원이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이지만, 문화예술 정책이 독자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시스템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각 영역의 전문가들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정책이 집행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정부와 집행기관이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부와 집행기관이 창조적 파트너십(Creative Partnership)으로 연결될 때 진정한 의미의 ‘팔길이 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 기관의 존재 이유가 창조성의 발현을 위한 문화예술의 지원이라는 점에서도, 문화예술의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관리하는 기구는 독립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기준이 아닌 문화적, 예술적, 인문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 지원과 진정한 의미의 ‘문화융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조’와 ‘문화융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새삼스럽게 ‘팔길이 원칙’을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특별법 제정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계기로 국민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문화융성’이 무엇인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불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문화생태계가 조성되고, 창의적 예술작품의 등장을 기대한다면 ‘팔길이 원칙’에 입각해서 문화예술 행정을 집행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문화선진국들은 문화예술을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선정하고, 국민이 문화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도록 ‘팔길이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문화선진국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지원 정책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문화예술의 향유를 정치적 목적보다는 정신적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가 진정으로 ‘문화융성’을 원하고 정부와 민간이 창조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운영 주체를 결정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아시아문화전당의 운영에서도 ‘팔길이 원칙’이 준수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정비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