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나희덕 시인이 깊은 목소리로 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를 낭송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존경과 감사의 울림이 퍼져 넘치는 자리. 바로 지난 6월 26일 ‘유엔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 행사가 열린 빛고을 아트 스페이스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뿐만 아니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가족 분들, 민청학련 및 긴급조치 9호 관련자 분들, 민족· 민주 열사 유가족 분들….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고문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암투병 중인 박심배, 박승희 열사의 아버지도 멀리 서울에서 달려오셨습니다. 아버지 곁에는 분명 박승희 열사도 함께 자리했을 테지요.

6월 26일은 ‘유엔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날입니다. 1998년 유엔 사무총장 코피아난은 이날을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로 지정하면서 기념사를 통해 “오늘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의 세월을 인내해 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고 했지요. ‘고문이 사라질 때까지, 고문을 자행하는 자들이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날까지’ 모든 정부와 시민사회, 그리고 개인이 싸울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호소에 응답하여 윤장현 광주시장, 그리고 오랜 세월 피해자들과 함께 해온 인권운동가들도 고문 없는 세상을 위해 걸음걸음 함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주 트라우마 센터는 지난해부터 이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올해, 2014년 ‘유엔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 캠페인의 주제는 ‘불처벌’(Impunity)입니다. ‘불처벌’은 고문과 부정의를 온존시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국가폭력과 고문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으면 다시금 그 야만적인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 몇 년 새 고문 조작이 밝혀져서 재심에서 무죄를 받는 과거사 사건은 많지만, 그 고문 조작의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 ‘불처벌의 관행’이 유지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불처벌의 관행’이 계속 된다면 지난 70여 년 동안 벌어졌던 학살, 고문, 간첩조작, 강제동원, 군대 내 폭력, 의문사, 철거 및 노동현장에서 벌어졌던 직· 간접적인 국가 폭력이 되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문을 비롯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정의의 실현입니다. 그 때문에 유엔은 ‘불처벌에 대한 투쟁 원칙’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와 피해자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 권리, 정의를 실현할 권리, 그리고 배상받을 권리가 그것입니다.

불처벌의 문제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주어진 진실·정의·배상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으며 나아가 국가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덧나게 만듭니다. 남미에서 불처벌 문제를 연구해 온 라우흐푸스(Rauchfuss) 박사는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 때문에 인권침해 생존자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생존자의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불처벌에 대한 투쟁은 인권에 관한 적법하고 도덕적인 투쟁일 뿐만 아니라 생존자의 지속적인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2014년 6월 26일은 국가폭력과 고문 생존자와 그 가족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날입니다. 고문을 종식하고 고문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노력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또한 불처벌의 관행과 싸우는 날이기도 합니다.

나희덕 시인이 낭독하신 시가 귓가에 남아 맴돕니다. “우리의 숨은 눈을 통하여/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오를 때까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고문과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 여러분의 희생과 헌신으로 오늘 저희가 있고, 광주가 있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고통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