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어떤 시작
2014년 02월 28일(금) 00:00 가가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아랫녘에 다녀오다가, 차창 밖으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베어낸 벼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겨울 논바닥에 어린 학생들이 줄지어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근처의 수련원으로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온 학생들이 ‘신고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어붙은 땅을 짚고 낑낑거리는 신입생들 옆에는 훈련소의 교관 같은 선배들이 뒷짐을 진 채 잔뜩 폼을 잡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제는 군부대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군기’를 잡기 위한 가혹행위가 고작 한두 살 위의 ‘하늘 같은’ 선배님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다.
신고식 문화는 기실 그 역사적·문화적 뿌리가 깊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신참례’라고 불렀는데, 16세기 서적인 ‘용재총화’에 기록된 사례를 보면 이 유구한 ‘전통’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 한 긴 나무를 신참에게 들게 하고, 들지 못하면 선배들이 윗사람에서 아랫사람으로 차례차례 주먹으로 무릎을 때린다.
그런가 하면 물고기 잡는 놀이라 해서, 신참을 연못 안에 집어넣고 옷이 흠뻑 젖도록 사모로 물을 퍼내게 한다. 누구에게 재미있고 즐거운지 알 수 없는 이 ‘놀이’는 ‘거미잡기’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검댕으로 두 손이 옻칠한 듯 검어지면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게 한다. 그런데 그 물이 얼마나 더러웠던지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단다. 이쯤 되면 술을 마시고 ‘상대별곡’을 노래하게 하는 것은 애교일 정도다.
조선의 천재 이율곡은 선배들에게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반발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을 때 선배들에게 불공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율곡이 선조 임금에게 폐습의 혁파를 건의하며 했던 이야기 중에 ‘신참례’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연원이 나온다.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나는 것들이 많아, 그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나이 어린 권문자제가 과거 급제한 일을 놀림조로 이르던 말)이라 지목하고 분격하여 욕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애초에 ‘신참례’는 집안의 후광에 힘입어 능력도 없으면서 등과한 애송이들을 향한 나름의, 정의의 ‘응징’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정의로운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논란이 저 시대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로 점점 변질하기 시작한 ‘신참례’는 조선에 들어와 체통을 깡그리 잃게 하여 염치를 버리게 한 뒤에야 벼슬아치 명부에 올려 주는 기득권자들의 ‘텃세’가 되고 말았다.
응징과 텃세 사이에는, 내가 전에 당했던 것을 뒷사람에게 돌려주려는 ‘복수’의 마음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 복수가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라 비겁하고 지질한 강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사자와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힘없는 뒷사람에게 보복한다는 사실이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 우악스런 신고식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엄연한 독재시절의 군사 문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위계질서와 권위의 강요, 그리고 간간이 첨가되는 폭력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도 ‘비쥐타주’라는 전통 신고식이 있고, 미국에도 대학 클럽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와 비슷한 신고식이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를 비롯한 어느 단체와 모임에도 이런 식의 신고식은 종종 나타난다.
역사학자나 종교사학자들은 이런 문화를 ‘고대로부터 이어진 통과의례의 속화된 형태’라고 해석한다. 혹독한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있으며, 새로운 구성원이 이른 시일 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라는 것이다. 한바탕 얼차려 뒤에 벌어지는 화해의 의식이 진정한 ‘패밀리(family)’를 만든다고 하는데….
논바닥에 엎드려 뻗쳤다 일어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선배들의 ‘말씀’을 경청하는 저 신입생들은 불공정하게 과거에 급제한 명문자제들이 아니다. 버릇을 고치기 위해 행한다는 학대와 구박은 좁은 책걸상에 갇혀 공부에 시달렸던 수험생 시절에 내남없이 모두 겪었던 일이다.
이제는 21세기다. 더 이상 ‘집단을 위한 개인’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다.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상대방을 모욕하고 학대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는 진정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나눌 수 없다. 함께 낮아지기보다는 함께 높아질 방법은 없을까? 진창에서 뒤엉켜 뒹구는 시작이 아닌 아름다운 시작이 절실한 터이다.
/소설가
얼어붙은 땅을 짚고 낑낑거리는 신입생들 옆에는 훈련소의 교관 같은 선배들이 뒷짐을 진 채 잔뜩 폼을 잡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제는 군부대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군기’를 잡기 위한 가혹행위가 고작 한두 살 위의 ‘하늘 같은’ 선배님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물고기 잡는 놀이라 해서, 신참을 연못 안에 집어넣고 옷이 흠뻑 젖도록 사모로 물을 퍼내게 한다. 누구에게 재미있고 즐거운지 알 수 없는 이 ‘놀이’는 ‘거미잡기’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검댕으로 두 손이 옻칠한 듯 검어지면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게 한다. 그런데 그 물이 얼마나 더러웠던지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단다. 이쯤 되면 술을 마시고 ‘상대별곡’을 노래하게 하는 것은 애교일 정도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애초에 ‘신참례’는 집안의 후광에 힘입어 능력도 없으면서 등과한 애송이들을 향한 나름의, 정의의 ‘응징’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정의로운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논란이 저 시대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로 점점 변질하기 시작한 ‘신참례’는 조선에 들어와 체통을 깡그리 잃게 하여 염치를 버리게 한 뒤에야 벼슬아치 명부에 올려 주는 기득권자들의 ‘텃세’가 되고 말았다.
응징과 텃세 사이에는, 내가 전에 당했던 것을 뒷사람에게 돌려주려는 ‘복수’의 마음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 복수가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라 비겁하고 지질한 강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사자와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힘없는 뒷사람에게 보복한다는 사실이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 우악스런 신고식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엄연한 독재시절의 군사 문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위계질서와 권위의 강요, 그리고 간간이 첨가되는 폭력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도 ‘비쥐타주’라는 전통 신고식이 있고, 미국에도 대학 클럽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와 비슷한 신고식이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를 비롯한 어느 단체와 모임에도 이런 식의 신고식은 종종 나타난다.
역사학자나 종교사학자들은 이런 문화를 ‘고대로부터 이어진 통과의례의 속화된 형태’라고 해석한다. 혹독한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있으며, 새로운 구성원이 이른 시일 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라는 것이다. 한바탕 얼차려 뒤에 벌어지는 화해의 의식이 진정한 ‘패밀리(family)’를 만든다고 하는데….
논바닥에 엎드려 뻗쳤다 일어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선배들의 ‘말씀’을 경청하는 저 신입생들은 불공정하게 과거에 급제한 명문자제들이 아니다. 버릇을 고치기 위해 행한다는 학대와 구박은 좁은 책걸상에 갇혀 공부에 시달렸던 수험생 시절에 내남없이 모두 겪었던 일이다.
이제는 21세기다. 더 이상 ‘집단을 위한 개인’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다.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상대방을 모욕하고 학대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는 진정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나눌 수 없다. 함께 낮아지기보다는 함께 높아질 방법은 없을까? 진창에서 뒤엉켜 뒹구는 시작이 아닌 아름다운 시작이 절실한 터이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