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횡설종설] 고향의 힘
2014년 01월 24일(금) 00:00 가가
1월 17일 저녁, 서울 남부 끝자락에서 화원을 가꾸며 먹고 사는 용진이가 저녁이나 먹자고 불렀다. 약속으로 치자면 1년이나 훨씬 전부터 졸라대어 성사된 것이었다. 용진이는 같은 반 친구 은순이와 산다. 은순이는 예쁘장했었다.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서교부락 동네 당산나무를 뱅뱅돌다가 함께 석양을 등지던 태환이와 오만이도 나왔다. 45년 전 당산나무파들의 회합이었다.
용진이가 굳이 만나자고 한 이유는 내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와서 유명해졌는데, 친구로서 대접이 늦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대접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격려로 들렸다. 직접 어부에게 부탁하여 귀하고도 비싼 흑산 홍어를 구해왔다. 이렇게 큰 돈을 쓴 용진이를 은순이는 용서할지 모르겠다. 도마까지 가지고 와서 그 자리에서 손수 썰어주는데, 홍어의 찰진 맛만큼이나 진하게 고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유명해진 친구는 맨날 시간 핑계대고 약속을 미루었는데, 세상 풍파 맨몸으로 견뎌 온 친구는 대접해 줄 시간만 기다리며 전화하고 또 전화했었구나. 텔레비전에 나오고 유명해졌다고 없는 돈 축내서 기어이 홍어 한 점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을 타향에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치밀한 시간핑계를 무력화시키고, 나를 결국에는 끌어내고야 마는 그 고향의 우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옛날 구슬치기 이야기만으로도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게 하고, 대차대조표로는 손해인 것이 분명한 일도 기꺼이 하게 하는 고향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향은 뿌리이고, ‘원래’이고, ‘본래’이고, ‘근거’이고, ‘까닭’이란 것들이 잘 계산되지 않는 형체로 그냥 뭉뚱그려져 있는 곳이 아닐까. ‘고향’(故鄕)이란 단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고향’은 단순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오랜 시간 전의 동네가 아니다. 만일 그런 동네라면 ‘故鄕’이라고 쓰지 않고, ‘古鄕’이라고 써도 될 법하다. 하지만 우리는 ‘古’가 아니라 ‘故’자를 써서 ‘고향’을 부른다. ‘故’는 ‘연고’이고 ‘근거’이고 ‘원래’이고 ‘본래’를 의미한다. ‘까닭’이자 ‘연유’이다.
그래서 ‘고향’에는 ‘나’의 본래적 모습, ‘원래의 나’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먼 곳에 다녀왔더라도 언제나 원래의 ‘나’가 발견될 수 있는 곳이다. 화장기 없이 나의 맨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곳, 거기서는 내가 ‘일반명사’로 이탈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아 있을 수 있다.
누군가 10대에 고향을 떠나지 않고는 대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성취와 성공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간다. 나의 터전을 떠나 그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뿌리’, ‘나의 까닭’을 품거나 묻어둔 채, ‘타자’(他者)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들이 ‘타자’들의 거대한 공간에서 또 다른 ‘타자’로 동화되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타향’(他鄕)이다. ‘타향’에서 ‘나’는 ‘고유명사’인 ‘나’로 돌아다니기보다는, 또는 ‘원래의 나’를 드러내고 다니기보다는 ‘타자’들과 동화되면서 가진 다양한 수식어 덩어리를 달고 돌아다니게 된다. 소위 ‘익명성’인 것이다.
‘타향’에서 나는 익명성 속에 숨어 지내는 ‘감춰진 존재’이다. ‘감춰진 존재’들끼리는 자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다양한 수식어를 통해서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 혹은 가난한 사람, 큰 차 타는 사람 혹은 작은 차 타는 사람, 전세 사는 사람 혹은 월세 사는 사람, 진보적인 사람 혹은 보수적인 사람, 좌파 혹은 우파, 보수 꼴통 혹은 종북 좌빨 등 익명성의 지배권은 철저히 인공적으로 조작된 이념이나 신념의 차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자의 진짜 모습보다는 정해진 이념이나 신념에 의해서 조정되거나 굴복되는 사람이라면 모두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일원으로 존재해버리면, 그것은 모두 타향살이이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두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를 화장기로 꾸며 놓은 뻣뻣한 무엇에 양보하고 사는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이다.
고향은 바로 내가 ‘나’로 드러나는 곳이다. 고향에서 나는 화장기 없이 맨 얼굴로 다닌다. 더 중요한 것, 더 본래적인 것, 더 맛있는 것은 모두 고향에 있다. 내 주인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용진이의 호출은 바로 고향의 호출이었다. 겨울밤, 찬바람을 이기며 돌아오는 내내 나는 오직 ‘나’만 바라보았다. 나는 고향에 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유명해진 친구는 맨날 시간 핑계대고 약속을 미루었는데, 세상 풍파 맨몸으로 견뎌 온 친구는 대접해 줄 시간만 기다리며 전화하고 또 전화했었구나. 텔레비전에 나오고 유명해졌다고 없는 돈 축내서 기어이 홍어 한 점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을 타향에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고향은 뿌리이고, ‘원래’이고, ‘본래’이고, ‘근거’이고, ‘까닭’이란 것들이 잘 계산되지 않는 형체로 그냥 뭉뚱그려져 있는 곳이 아닐까. ‘고향’(故鄕)이란 단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에는 ‘나’의 본래적 모습, ‘원래의 나’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먼 곳에 다녀왔더라도 언제나 원래의 ‘나’가 발견될 수 있는 곳이다. 화장기 없이 나의 맨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곳, 거기서는 내가 ‘일반명사’로 이탈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아 있을 수 있다.
누군가 10대에 고향을 떠나지 않고는 대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성취와 성공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간다. 나의 터전을 떠나 그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뿌리’, ‘나의 까닭’을 품거나 묻어둔 채, ‘타자’(他者)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들이 ‘타자’들의 거대한 공간에서 또 다른 ‘타자’로 동화되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타향’(他鄕)이다. ‘타향’에서 ‘나’는 ‘고유명사’인 ‘나’로 돌아다니기보다는, 또는 ‘원래의 나’를 드러내고 다니기보다는 ‘타자’들과 동화되면서 가진 다양한 수식어 덩어리를 달고 돌아다니게 된다. 소위 ‘익명성’인 것이다.
‘타향’에서 나는 익명성 속에 숨어 지내는 ‘감춰진 존재’이다. ‘감춰진 존재’들끼리는 자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다양한 수식어를 통해서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 혹은 가난한 사람, 큰 차 타는 사람 혹은 작은 차 타는 사람, 전세 사는 사람 혹은 월세 사는 사람, 진보적인 사람 혹은 보수적인 사람, 좌파 혹은 우파, 보수 꼴통 혹은 종북 좌빨 등 익명성의 지배권은 철저히 인공적으로 조작된 이념이나 신념의 차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자의 진짜 모습보다는 정해진 이념이나 신념에 의해서 조정되거나 굴복되는 사람이라면 모두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일원으로 존재해버리면, 그것은 모두 타향살이이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두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를 화장기로 꾸며 놓은 뻣뻣한 무엇에 양보하고 사는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이다.
고향은 바로 내가 ‘나’로 드러나는 곳이다. 고향에서 나는 화장기 없이 맨 얼굴로 다닌다. 더 중요한 것, 더 본래적인 것, 더 맛있는 것은 모두 고향에 있다. 내 주인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용진이의 호출은 바로 고향의 호출이었다. 겨울밤, 찬바람을 이기며 돌아오는 내내 나는 오직 ‘나’만 바라보았다. 나는 고향에 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