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영의 집과 사람] 경교장의 당구실
2014년 01월 17일(금) 00:00 가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임시정부 시절 김구 선생의 집무실인 경교장(사적 465호,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번지 혹은 새문안로 29)을 복원하면서 그 곳에 당구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다. “독립과 통일운동에 힘써야 할 선생께서 당구나 치면서 소일했단 말이냐” 라며 다들 공분했는데, 경교장에는 왜 당구실이 있었던 걸까.
본디 경교장은 일제시대 금광사업으로 큰 돈을 모은 최창학이 1938년 자신의 사저로 지은 건물로, 처음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며, 건립 당시인 19세기 유럽 귀족의 주거문화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중세의 유럽 귀족은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광대한 영지에 자신의 성관(城館)을 짓고 살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방이 무기실(武器室)이었다.
귀족은 특권이 많은 만큼 의무도 많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의무가 국가 위급 시에 몸소 무장을 하고 농노를 병사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일이었으니, 무기실은 갑옷과 무기를 두는 방이자 귀족과 기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이었다.
그런데 근세로 넘어오면서 기존의 귀족과 기사 계급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칼과 방패가 아닌 의학, 법률, 금융 등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신흥계층들이었다. 이들은 신사(gentry, gentleman)라 불렸는데 기존의 무기실 대신 새로운 정보를 얻고 전문지식을 익히기 위한 장소로서 서재가 중요하게 되었다.
18∼19세기 신사의 모습은 ‘셜록홈즈’ ‘위대한 유산’ 등에 묘사되어 있는바, 대개 엄장한 서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중세를 무대로 하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무기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서재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공간을 너머 신사라는 신흥계급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방이었다.
한편 중세 귀족과 기사가 몰락해감에 따라 무기실도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200여 년 간에 걸친 유럽 귀족주택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면 무기실이 점차 쇠퇴하고, 중세 말기 골방과 다름없었던 서재가 점차 비대해지면서 전면에 등장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사계층이 쇠퇴하면서 신흥 신사계급이 성장하는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시기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때로 무모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기사의 모습은 쇠락해가는 그의 슬픈 자화상이다.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보검은 이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유물로 남게 됐다. 본디 실전을 위한 중세의 검술이 펜싱이라는 현대의 스포츠로 변하면서 무기실은 검술연습실 내지는 당구실로 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당구장 유리창에 흔히 그려져 있는, 큐대를 X자로 교차시키고 당구공 네 개를 배치해 놓은 그 당구장 표시(※)는 두 자루의 칼과 투구, 방패를 예전의 무기실 벽면에 걸어놓던 풍습에서 유래한다. 당구실은 검술과 당구 등 실내스포츠를 즐기는 방이자 미혼의 젊은 남자들이 모이는 방이기도 했다. 장년의 아버지가 주로 머무는 곳이 서재였다면 젊은 아들과 그 친구들이 모이는 방이 당구실이었다.
19세기 귀족 주택에서 당구실과 서재는 남자의 공간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방이었고, 그 모습은 1938년 최창학의 죽첨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집으로 지하에는 부엌과 창고가 있으며, 1층은 손님 접대를 위한 응접실, 식당, 연회장 및 당구실, 2층에 침실이 있었다.
해방 후 이곳이 김구 선생에게 제공되어 명칭이 경교장(京橋莊)으로 변하였고, 1949년 선생이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쓰였다. 이후 외국대사관, 미군주둔 사무소 등 혼란스러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얼마 전까지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새로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1층에 당구실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건축에서 어떤 방의 명칭이 정해지면 본래 용도와는 달리 처음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주택에서 서재라 불리는 방이 실제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가장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실(私室)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하지만 명칭은 언제나 서재로 불리는 것처럼 당구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젊은 남성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선생이 사용하는 서재 외에 열사들이 모이는 방으로서 당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그곳은 당구실이 아닌 선전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경교장에 당구실이 있던 이유였다. 경교장의 당구실 복원 논란은 이 모든 상황에서 빚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건축 칼럼니스트〉
귀족은 특권이 많은 만큼 의무도 많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의무가 국가 위급 시에 몸소 무장을 하고 농노를 병사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일이었으니, 무기실은 갑옷과 무기를 두는 방이자 귀족과 기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이었다.
그런데 근세로 넘어오면서 기존의 귀족과 기사 계급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칼과 방패가 아닌 의학, 법률, 금융 등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신흥계층들이었다. 이들은 신사(gentry, gentleman)라 불렸는데 기존의 무기실 대신 새로운 정보를 얻고 전문지식을 익히기 위한 장소로서 서재가 중요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때로 무모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기사의 모습은 쇠락해가는 그의 슬픈 자화상이다.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보검은 이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유물로 남게 됐다. 본디 실전을 위한 중세의 검술이 펜싱이라는 현대의 스포츠로 변하면서 무기실은 검술연습실 내지는 당구실로 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당구장 유리창에 흔히 그려져 있는, 큐대를 X자로 교차시키고 당구공 네 개를 배치해 놓은 그 당구장 표시(※)는 두 자루의 칼과 투구, 방패를 예전의 무기실 벽면에 걸어놓던 풍습에서 유래한다. 당구실은 검술과 당구 등 실내스포츠를 즐기는 방이자 미혼의 젊은 남자들이 모이는 방이기도 했다. 장년의 아버지가 주로 머무는 곳이 서재였다면 젊은 아들과 그 친구들이 모이는 방이 당구실이었다.
19세기 귀족 주택에서 당구실과 서재는 남자의 공간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방이었고, 그 모습은 1938년 최창학의 죽첨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집으로 지하에는 부엌과 창고가 있으며, 1층은 손님 접대를 위한 응접실, 식당, 연회장 및 당구실, 2층에 침실이 있었다.
해방 후 이곳이 김구 선생에게 제공되어 명칭이 경교장(京橋莊)으로 변하였고, 1949년 선생이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쓰였다. 이후 외국대사관, 미군주둔 사무소 등 혼란스러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얼마 전까지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새로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1층에 당구실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건축에서 어떤 방의 명칭이 정해지면 본래 용도와는 달리 처음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주택에서 서재라 불리는 방이 실제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가장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실(私室)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하지만 명칭은 언제나 서재로 불리는 것처럼 당구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젊은 남성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선생이 사용하는 서재 외에 열사들이 모이는 방으로서 당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그곳은 당구실이 아닌 선전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경교장에 당구실이 있던 이유였다. 경교장의 당구실 복원 논란은 이 모든 상황에서 빚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건축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