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법과 문화] 2014, 갑오년의 정치와 예술
2014년 01월 10일(금) 00:00 가가
“나라가 불행하면 시인이 행복하다”(國家不幸 詩人幸)라는 옛말이 있다. 이른바 ‘난세’가 예술의 황금기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분노와 소외, 절망과 한탄의 산물이다. 불의의 질서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심미적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령이다.
또 한해가 바뀌었다. 으레 그러하듯이 새해 벽두에는 온갖 수사가 난무한다. 이번에 대통령이 내는 구호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천만번 타당한 명제이니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으랴? 문제는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지을 권한을 가지는가이다. 정권인가? 아니면 국민인가?
‘달력은 권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에도 세금을 더 걷기 위해 태양력 대신 태음력을 쓴 적이 있다. 2014년, 갑오년 원단에 청와대가 내거는 달력에는 국민의 일상을 섬길 어떤 세부계획이 적혀 있을까? 교수신문이 내놓은 지난 해 영신(迎新)의 염은 ‘제구포신’(除舊布新)이었다. 묵은 것을 떨치고 새 것을 펼치라.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 건네는 덕담이었다.
그런데 연말의 결산 평가는 냉엄했다. ‘도행역시(倒行逆施)’. “그릇된 길을 고집하고, 시대착오적인 악행을 도모했다.” 이웃나라 중국 언론도 이 문구를 인용하여 한국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2014년, 교수신문은 다시 새해의 제언을 내걸었다. ‘전미개오(轉迷開悟)’. “속임과 거짓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자.” 모두가 곱씹을 경구다. 더더구나 갑오년이 아닌가, 60년 단위 회돌이가 시작하는 해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전래의 관념이 새삼 비장하다.
두 환력(還曆)전 갑오 1894년, 그해 한반도에 불어 닥친 경장(更張)의 회오리는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 개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때 새 세상을 갈구하던 염원, 동학의 뿌리가 어디였던가? 언제부턴가 ‘남도’라면 으레 전라도를 지칭하게 되었다. 문화도, 예술도 남도가 아니면 진품도 명품도 아니다.
호남의 정서가 몸에 익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도 쓸 수가 없었다. 1980년 광주의 불행이 예술적 분노의 영감에 진한 기름을 부었다. 이따금씩 되묻는다. 그때 나는,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라고. 원로 역사학자 지명관은 “광주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죄악이다”이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때 불의의 권력은 ‘빨갱이’와 ‘전라도’를 함께 묶어 남도 시민을 ‘역도’로 몰았다. 미국의 타임지와 뉴스위크지는 그해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의 최상위에 광주를 올렸다. 미국의 간접적 묵인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한 가식을 용납하지 않는 법, 시민을 학살한 원흉은 처벌받았고 ‘폭도’는 잃은 목숨 대신 민주시민의 명예를 되찾았다. 그때 그 일은 빨갱이의 짓도, 전라도 사람들의 지역감정도 아니라, 거룩한 민주시민의 봉기였다는 바른 역사가 정립되었다.
“광주일고는 경북고에 져야 돼. 그것이 포에틱 저스티야.”라던 황지우 시인의 자조도 몽매한 잔혹의 세월, 한낱 푸념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제부터인가 광주의 옛 상처가 다시 아리고, 오래 전에 아문 딱지가 쓰리다. ‘종북, 좌파’의 낙인을 치켜든 권력이 발호한다. 이 무슨 변고인가!
영화 ‘변호인’이 천지를 울린다. 허구와 사실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영화다. 한 가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그때 그 무뢰한들은 광주와 부산·마산의 양심을 갈라놓고자 획책했다. 정치야 지역 따라 쪼개지더라도 인간의 양심마저 갈라질 수 없는 법이다.
송강호의 대사가 본질을 두드린다.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 “국가란 국민이다.” 지역을 가르는 비상식을 팽개치고 국가가 모든 국민을 섬기는 나라, 그런 나라가 상식적인 나라가 아니겠는가?
권력의 속성은 비열하고 잔인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보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라. 러시아 공산주의가 멸망하고, 박정희 군사독재가 사라진 지 오래인 이 시점에도 여전히 작품이 읽히는 이유가 있다.
남도, 빛고을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낮이를 거부하는 무등산의 늠연한 기품과 사랑이 자랑스럽다. 남도의 시인, 호남의 예술인은 상식을, 인간을, 정의를 외칠 권리와 책무가 있다.
오래토록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인의 여향에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나’ 구절이 되살아난다. “알록 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가시내야, 나의 가슴 그늘진 오솔길을 헤매지.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천 리, 천 리 또 천 리, 산마다 불탔을 것인데”
오랜 세월 숱한 상처를 떨치고 평화와 인권의 도시로 거듭나는 광주, 그 사랑의 땅에 내 작은 사랑을 보탠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또 한해가 바뀌었다. 으레 그러하듯이 새해 벽두에는 온갖 수사가 난무한다. 이번에 대통령이 내는 구호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천만번 타당한 명제이니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으랴? 문제는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지을 권한을 가지는가이다. 정권인가? 아니면 국민인가?
그런데 연말의 결산 평가는 냉엄했다. ‘도행역시(倒行逆施)’. “그릇된 길을 고집하고, 시대착오적인 악행을 도모했다.” 이웃나라 중국 언론도 이 문구를 인용하여 한국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호남의 정서가 몸에 익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도 쓸 수가 없었다. 1980년 광주의 불행이 예술적 분노의 영감에 진한 기름을 부었다. 이따금씩 되묻는다. 그때 나는,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라고. 원로 역사학자 지명관은 “광주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죄악이다”이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때 불의의 권력은 ‘빨갱이’와 ‘전라도’를 함께 묶어 남도 시민을 ‘역도’로 몰았다. 미국의 타임지와 뉴스위크지는 그해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의 최상위에 광주를 올렸다. 미국의 간접적 묵인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한 가식을 용납하지 않는 법, 시민을 학살한 원흉은 처벌받았고 ‘폭도’는 잃은 목숨 대신 민주시민의 명예를 되찾았다. 그때 그 일은 빨갱이의 짓도, 전라도 사람들의 지역감정도 아니라, 거룩한 민주시민의 봉기였다는 바른 역사가 정립되었다.
“광주일고는 경북고에 져야 돼. 그것이 포에틱 저스티야.”라던 황지우 시인의 자조도 몽매한 잔혹의 세월, 한낱 푸념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제부터인가 광주의 옛 상처가 다시 아리고, 오래 전에 아문 딱지가 쓰리다. ‘종북, 좌파’의 낙인을 치켜든 권력이 발호한다. 이 무슨 변고인가!
영화 ‘변호인’이 천지를 울린다. 허구와 사실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영화다. 한 가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그때 그 무뢰한들은 광주와 부산·마산의 양심을 갈라놓고자 획책했다. 정치야 지역 따라 쪼개지더라도 인간의 양심마저 갈라질 수 없는 법이다.
송강호의 대사가 본질을 두드린다.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 “국가란 국민이다.” 지역을 가르는 비상식을 팽개치고 국가가 모든 국민을 섬기는 나라, 그런 나라가 상식적인 나라가 아니겠는가?
권력의 속성은 비열하고 잔인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보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라. 러시아 공산주의가 멸망하고, 박정희 군사독재가 사라진 지 오래인 이 시점에도 여전히 작품이 읽히는 이유가 있다.
남도, 빛고을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낮이를 거부하는 무등산의 늠연한 기품과 사랑이 자랑스럽다. 남도의 시인, 호남의 예술인은 상식을, 인간을, 정의를 외칠 권리와 책무가 있다.
오래토록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인의 여향에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나’ 구절이 되살아난다. “알록 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가시내야, 나의 가슴 그늘진 오솔길을 헤매지.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천 리, 천 리 또 천 리, 산마다 불탔을 것인데”
오랜 세월 숱한 상처를 떨치고 평화와 인권의 도시로 거듭나는 광주, 그 사랑의 땅에 내 작은 사랑을 보탠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