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밤들은 아름다웠다. 매주 수요일 저녁엔 될 수 있는 한 약속을 미루고, 혹 일정이 있으면 서둘러 마치고 돌아왔다. 석 달에 걸쳐 9차시로 예정된 강의를 한 번이라도 빼먹기 싫어서였다.

어느덧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가을밤, 일찌감치 저녁을 챙겨먹고 동네 사랑방에 모여 앉아 배우는 일은 참으로 맛깔났다. 중학생부터 40대와 50대 학부모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동학(同學)들이 함께했던 공부는 다름 아닌 ‘한국미술사’. 한국의 미술 문화를 고대부터 근대까지, 암각화부터 자기에서 서화까지 종횡으로 톺아보는 내용이었다. 당장 ‘써먹을 것’이 아니라면 배우기는커녕 돌아보지도 않는 세상의 풍조로 가늠하면 참으로 쓸데없는 호사의 취미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맞다. 사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호사스런 공부를 하는 목적은 값비싼 골동품에 대한 감식안을 높여 소유의 생심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우리가 옛사람들이 남긴 유산을 좇으며 배운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을 보는 눈, 찾는 눈이었다.

동학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에서 돌아와 고단한 몸을 부린 작은 방안은 끊임없는 감탄사로 가득 찼다. 아, 그리고 오! 한 시대의 눈부신 절정을 앞에 두고 장황한 말은 필요치 않았다. 고구려 강서대묘의 생명감 넘치는 현무도 앞에서, 신라 석굴암 본존불의 냉정하고 이지적인 위엄 앞에서, 정교한 백제 대향로와 귀족문화의 극치를 드러낸 고려 상감청자 앞에서, 다만 느껴 탄복할 뿐이었다.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감탄과 이해의 재능,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위대한 시인의 형제가 될 수 있는 기능”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 모두는 비루한 일상을 훌쩍 뛰어넘어 갑자기 시인의 형제가 되었다. 기어이 되고자 하였다.

기실 배우지 않으면 뻔히 보고도 알지 못하기 십상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비교적 박물관 관람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믿었지만,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방도를 배우고 나니 지금껏 내가 한 일은 주마간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상감청자와 분청사기와 청화백자와 철화백자가 어떤 흐름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모르는 내 눈에 그것들은 파란 도자기와 하얀 도자기와 파란 무늬와 빨간 무늬로밖에 구분되지 않았다. 그림 한 폭 안에 천지를 담아내겠다는 지척천리(咫尺千里)의 철학으로 그려진 산수화가 서양의 풍경화의 투시법이나 원근법과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알지 못했기에, 참으로 괴상한 모양의 바위와 제멋대로의 구도가 다 있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지나쳤다. 배우니 비로소 보였다. 그것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삶이, 그리고 마음이.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나지막한 탄식이 절로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혼자 일하고 혼자 공부하기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선생님을 통해, 동학들과 함께 배우는 기쁨도 만만찮았다. 문화재청에 근무하며 그 역시 박사 논문을 쓰는 ‘학생’이기도 한 선생님은 배우는 자 특유의 열정과 겸손으로 우리가 질문한 것들을 전문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물어와 다음 시간에 꼼꼼히 가르쳐주셨다. 나는 선생님께 아름다움과 더불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농사짓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동학도 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짜리 최연소 수강생이었는데, 지루한지 수업 중 가끔 졸기도 하던 녀석이 진금기화(珍禽奇花: 상서로운 물상으로 선택된 새와 꽃)를 배우는 시간에는 갑자기 눈을 번쩍이더니 ‘응격천아도’에서 매가 공격하는 모가지 긴 새가 학이나 황새가 아니라 정확하게 ‘큰고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며 새 마니아로서의 깐질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를 가르친다.

참으로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할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에 배워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 하지만 ‘오직 모를 뿐’임을 인정하면 고개는 숙여지고 몸은 낮아진다. 그리고 오만이 사라진 그 자리에 진정한 공부에 대한 기쁨이 채워진다. 아무러한 환난의 때에도 아름다움은 있었다. 어느 한 시절 마냥 꽃 시절 꽃자리이기만 했겠느냐만, 그 와중에도 소중한 아름다움을 피워낸 사람들이 있어 삭막한 마음에 뭉근한 위로가 된다. 돌과 흙과 쇳덩이로 빚어낸 소망이, 종이 위에 펼쳐낸 꿈이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자극적인 인공의 조형물에 혹사당한 눈을 어루만진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만은 백제인이 되었다가 신라인이 되었다가 고구려인이 되었다가, 이름 없는 도공이 되었다가 불우한 화가가 되었다가 고고한 선비가 되기도 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였다.

아름다움을 배웠으니 아름답게 알아야 할 테다. 아름답게 알아 아름답게 살아야 할 테다. 진짜 공부는 이제부터이니,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바쁘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