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동경에서 국제 도서전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이 주제국으로 한국 문화와 문학에 대한 특별전시와 행사가 열렸다. 한일 출판 관계자들이 모이는 만찬에서 일본출판협회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한국의 주제 행사가 그동안의 여러 나라의 주제국 행사 어느 것보다도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본 측 대표가 적극적인 호감을 표시하는 말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눈 어느 일본 출판사 대표도 일본의 정치가들이 한일관계를 긴장하게 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과거에 대한 사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과거에 범한 잘못들이 일본 국민 전체가 행한 것이 아니며, 일본 국민도 그 희생자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이해해주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하여 도발적인 발언들이 있었지만, 이 출판사 대표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모든 일본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국과의 분쟁의 대상이 되어 있는 센카쿠 열도 디아오유도(釣魚島)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 하토야마 전 수상의 대담한 발언은 이미 보도된 바이다.

일본에 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위안부에 대한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의 발언이 있은 후 30개나 되는 지방의회에서 이것을 규탄하는 결의가 있었다. 반한(反韓) 시위가 있을 때에는 대체로 그것에 반대하는 시위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이 민주사회로 발전하여 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한일 관계가 적대적으로 빠져들어 가서는 아니 된다는 사람들의 느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분쟁을 최대한으로 방지하는 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오늘의 최대 과제이다. 동북아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우선적인 과제는 지역의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반드시 정치적인 방법으로만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정치적인 또는 탈정치적인 교환이 심화됨에 따라 정치적인 해결이 그에 뒤따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한 점에서 한류와 같은 대중문화의 교류, 또 다른 차원의 문화적 교류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교류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경제 관계의 확대 그리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여러 나라의 지리적 거리를 좁히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서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동북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느끼는 것은 한일 관계, 한중 관계 또는 다른 국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부딪치는 정치적인 문제들이 반드시 정치적으로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사를 너무나 좁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불인지심(不忍之心)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를 자기도 모르게 구하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맹자는 이러한 마음에서 도덕의 심리적 기초를 찾았다. 그런데 이러한 차마 견디지 못하는 마음은 가까이 있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맹자는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마음을 중요시했다.

제(齊)의 선왕(宣王)이 희생에 쓰려는 소를 보고 소를 놓아주고, 양으로 대체하라는 명을 내린 일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모순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맹자는 소는 눈앞에 본 것이고, 양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진 마음의 움직임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어진 마음이 치정자의 마음의 핵심이어서 마땅하다고 했다.

정치는 문제를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추상화가 좋은 결과를 맺으려면,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들의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쌓아올려져 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강한 주장을 내세웠다가도 마주보고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차마 못하는 마음이 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 정치를 피한, 작고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잊지 않을 필요가 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