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모두 흥분하게 하는 것은 정치이다. 삶의 큰 테두리의 하나가 정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이 나날이 사는 세계는 그 보다는 작은 세계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세계가 평화롭고 편안한 것이기를 원한다.

50년 전 미국에서는 돈 없는 학생이 갈 곳이 있으면, 길가에 서서 손가락 하나로 차를 세워 그것을 얻어 타고 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이 일반화되어 그것은 피차에 위험한 일이 되었다. 프랑스를 잘 아는 사람과의 이야기를 들으니,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오토 스톱’이 가능하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운데도 아직 작은 선의의 망(網)이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사회적 선의 또는 신뢰의 망이 있는 것일까? 한국은 정이 많은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정이 선의의 망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선의는 정처럼 진하지는 않다. 인간 모두를 인간으로 보게 하는 보편성의 렌즈가 일반화되어야 보편적 선의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이 있어서, 프랑스 혁명의 구호에 나오는 ‘유대’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물론 선의는 마음의 다른 덕성에 연결된다. 선의는 타인을 믿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야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의 한 요소는 정직성이다. 정직성에 대한 독일 본 대학 노동연구소의 연구가 얼마 전 독일의 한 신문에 보도되었다. 약 700명의 학생을 전화로 접촉하여, 동전을 던져, 동전이 머리가 나왔는지 꼬리가 나왔는지를 알려 달려고 요청했다. 꼬리가 나왔다면 상금으로 15 유로가 지급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동전을 혼자 던지는 데, 어느 쪽이 나왔는지는 다른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고의 결과는 완전히 정직한 것이었다. 15 유로의 상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들을 정직하게 그대로 보고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통계에 기초해서 추측한 것이다. 통계적 평균으로 머리와 꼬리는 각각 50%가 되는데, 보고 결과는, 상 받는 ‘꼬리’가 44%, 상 받지 못하는 ‘머리’가 56%였다.

오늘의 인간관계는 힘과 이익의 관계에 일치하는 수가 많다.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의 영수로 있을 때, 기자들에게 “나를 착한 사람으로 알지 마시오”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때였으니까, 상황이 예외적이라고 할 것이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대체로 ‘착하다’하면 ‘어리석다’는 말에 비슷한 뜻을 가질 수 있다. 독일인은 정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에도 착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 말한 기사의 첫 줄은 “명예롭게 행동하는 사람은 바보인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명예롭다’는 말이다. 이 기사의 제목은 ‘명예로운 독일인’이라는 것이다. 독일어에서 또 서구어에서 ‘정직하다’는 ‘명예롭다’와 거의 같은 말로 쓰인다. 우리가 한사코 얻고자하는 명예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주는 벼슬이나 훈장이나 증명서에서 생긴다. 서양 전통에서 명예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스스로 높은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정직은 도덕이나 윤리의 규범이면서 동시에 자존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을 말해?’ 하는 마음이 정직의 심리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의(道義)에 대한 느낌 이전 자기의 존재감에 관계된다. 낯선 사람에 대한 선의의 경우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의가 일상화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다.

어떤 동기에서든지 정직은 독일인의 당연한 행동규범이다. 독일은 국가적으로 부패인식지수라는 척도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정치가 투명하게 움직이는 것은 그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치가 투명하게 움직이면, 사람 사는 세계가 맑아지고 쓸 데 없는 의심과 경계와 계략이 후퇴한다. 그리고 선의는 인간관계의 일반적인 매체가 된다.

〈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