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고3이었을 때, 아침 일곱 시까지 등교해야 했기 때문에, 승용차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잠이 부족한 아이는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졸기 시작했지만, 나는 비몽사몽 간에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걸 기대하며 라디오의 영어 회화 방송에 채널을 맞추곤 했다. 나중에는 아이가 시끄럽다고 신경질을 냈기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볼륨을 낮추어 결국 운전석에 앉은 나만 그 방송을 듣고 다녔다.

그 방송에서는 청취자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코너도 있었는데, 어느 날, 진행자가 이런 편지를 읽어 주었다. “언니, 얼마나 공부해야 언니처럼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나도 순간 귀를 쫑긋하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는데, 그 대답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한 십 년은 해야지요.”

십 년이라니, 십 년 동안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한단 말인가? 십 년이면 내 나이가 오십대 중반도 넘을 터였다. 시큰둥한 마음으로 볼륨을 다시 낮추는데, 이어진 진행자의 말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십 년이 긴 세월이라고 해서 시작하지 않으면, 십 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태로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시작하면, 십 년 후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거죠.”

만일 내 삶에서, 생각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준 한 마디를 꼽으라면, 나는 이 말을 들고 싶다. 모두들 바쁜 세상에서 하루가, 한 해가 훌쩍 지나간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꾸준히 하는 일이 없다면 실력과 힘을 쌓을 겨를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너무 요원하게 보이거나 번거롭게 느껴질 때, 나는 이 말을 생각하고 용기를 낸다.

얼마 전에는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에 교장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었던 분에게서 총 여섯 권으로 되어 있는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그분은 살아 오시면서 늘 전라도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해와 왜곡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분은 전라도 출신 인물들을 탐구해 보고자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어떤 인물들이 나와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살펴 보면 그 시비를 가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교직 생활 정년 후부터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을 오가며 책과 씨름하고, 문중을 찾아가 자료를 모으고, 묘지(墓誌)와 문집을 다시 읽고 해석하여 집필을 시작한 지 십여 년, 그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라도 출신 106인의 생애를 담은 이 책들을 출간한 것이다. 그분은 유명한 학자도 아니고, 무슨 연구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관심과 사명감만으로 십여 년의 세월을 천착하여 전라도의 정신적 원류 혹은 학풍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인물사를 엮어낸 것이다.

해마다 삼월이면, 몇 명의 신입생들과 한 팀이 되어 한 학기를 보내는 학교의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신입생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를 먼저 묻는다. 신입생들은 꿈이 많다.

작가, 영화 감독, 외국인을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 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다시 묻고, 그것을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권한다.

자신이 흥미있는 분야에서, 당장 바쁘지는 않더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한 십 년 정도의 내공이 쌓인다면 인생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겠는가?

/이미란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소설가